그런데 수백억원 규모의 큰돈이 오가는 기업 간 거래에서는 이런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제조·용역·건설업 하도급 기업 네 곳 중 한 곳은 거래하면서 계약서를 쓰지 않고 구두 계약만 맺었다. 한국의 하도급 기업 중 계약서를 받지 못한 기업의 비율(서면 미교부 비율)은 1982년 계약서 작성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이후 한 번도 2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한국경제신문이 23일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조성욱·사진)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용역·건설업종 기업 9만4600여 곳 중 하도급 업무를 하면서 계약서를 제대로 받지 못한 비율은 23.3%(2만2000여 곳)에 달했다.
이 비율은 △2015년 47.0% △2016년 38.1% △2017년 34.9% △2018년 43.6%였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난해 서면 미교부 비율은 예년에 비해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계약서를 쓰지 않는 거래가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면 미교부는 집중 감시를 받는 대기업보다는 중견·중소기업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해외 기업과 거래하는 수출 기업보다는 내수 기업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갑질’ 등 하도급 관련 불공정거래 행위의 대부분은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하도급 계약은 작업을 먼저 의뢰한 뒤 완료 후 대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원청 기업이 계약서가 없다는 점을 빌미로 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비용 없는 추가 작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경기가 좋을 땐 구두 계약만으로도 하도급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만 경기가 악화되면 피해를 보는 하청 기업이 급증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공정위 관계자는 “불공정행위를 제재하기 위해서는 물증이 필요한데, 계약서가 없으면 물증 확보가 훨씬 어렵다”며 “유사시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서라도 계약서를 반드시 써둬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간 거래에서 한국처럼 계약서를 잘 쓰지 않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서구 선진국 중에서는 아예 관련 제재가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계약서 없는 거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원청 기업과 하청 기업이 동등한 계약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선 일을 주는 원청이 이를 받는 하청에 군림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원청과 하청 간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 계약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는 게 급선무”라며 “이런 문화가 뿌리내린다면 하도급법 관련 규제를 지금보다 완화해도 민사 계약에 기반한 사적 자치를 통해 불공정행위 빌미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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