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발명되기 전 판화는 예술을 확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한 점밖에 없는 유명한 작품을 복제해 공유하는 방법이 판화 외에는 없었다. 사진도 없고, 여행도 쉽지 않았던 시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판화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등장 이후 그 역할은 빛을 잃었다. 복제 가능함은 저평가의 재료가 됐다. 국내에서 판화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무제한 찍어낼 수 있다”는 인식 탓에 판화 시장은 오랫동안 침체돼 있다.
최근 판화에 대한 낡은 인식을 깨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설립 초기 운영 부장을 맡았던 이지윤 큐레이터(숨프로젝트 대표)가 판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나섰다. 지난달 초 그는 아니쉬 카푸어, 데이비드 호크니, 줄리안 오피 등 세계 정상급 예술가들의 ‘판화 에디션(한정판)’ 작품을 살 수 있는 매장을 열었다. 신세계 계열 호텔인 그랜드조선 부산에 글로벌 아트 에디션 플랫폼 ‘에디션 알리앙스’ 1호점을 냈다. ‘판화는 복제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의 장르’라는 것을 알리려는 시도다.
이 대표는 국내 판화 시장이 침체된 가장 큰 이유가 “판화는 대량 인쇄물이란 오해 때문”이라고 했다. 판화는 작가가 목판화,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만드는 ‘오리지널 작품’이다. 대부분 25~75장 정도만 한정판으로 작업한다. 몇몇 작가는 그들만의 의미 있는 숫자를 정해 그만큼만 찍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화가 앤디 워홀이다. 그는 250장의 에디션을 만들었다. 생전에 찍지 못한 작품은 앤디 워홀 파운데이션을 통해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제작, 판매하고 있다.
이 대표는 소수 특권층만 누리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에디션 알리앙스를 열었다. 판화는 일반 유화 등에 비해 비교적 가격이 낮다. 문턱이 낮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소장하고 즐길 수 있다. 에디션 알리앙스에서 판매하는 판화 작품 가격은 50만~2500만원 정도다. 동일한 작가들의 유화 작품 가격은 최소 1억원이 넘는다.
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판화를 활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싱가포르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더 많은 국민이 작품을 즐기도록 미국 타일러 프린팅 기계와 타일러 프린트 컬렉션을 사들였고, 이는 2002년 싱가포르 타일러 프린트 인스티튜트(STPI)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STPI는 세계적인 판화 공방으로 성장했다. STPI는 미국 판화가 케네스 타일러의 판화 공방을 모티브로 삼았다. 타일러는 20세기 중반 요제프 알베르스, 데이비드 호크니, 재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혁신적 판화를 제작해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 대표는 “침체된 한국 판화 시장에서 에디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고 판화의 격이 있는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디션 알리앙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K판화’를 키워 국내 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곽남신, 최정화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한국 예술가의 에디션 작품 기획, 제작을 지원해 세계 진출을 도울 계획이다.
곽남신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도 왜곡되고 덜 알려진 판화의 세계를 알리는 새로운 기회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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