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 용산의 한 우체국. 미국에 거주하는 누나에게 마스크를 보내려던 이모씨는 소포용 골판지 상자가 떨어졌다는 얘길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체국 소포창구 직원은 “보통 4호와 5호 박스 수요가 많은데, 며칠 전부터 박스 제조업체가 물량이 달린다며 보내주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화장품 제조업체도 박스가 부족해 수출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보통 주문하고 1주일이면 들어오던 박스가 요즘은 3~4주 이상 걸린다”며 “어쩔 수 없이 생산 일정을 늦추고 중국 거래처에 양해를 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연말 박스 대란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대양제지 화재로 골판지 원료인 원지 가격이 급격히 오른 뒤 공급마저 차질을 빚으면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온라인 택배 물량이 급증한 데다 수요가 많은 연말 시즌이 겹치면서 박스 파동이 본격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12일 발생한 원지 생산업체 대양제지의 경기 안산공장 화재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대양제지 시장 점유율은 7%(약 3만t)였지만 시장에 미치는 여파는 수치 이상이다. 김진무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 전무는 “대양제지 화재 후 물량 부족을 예상한 관련 업체들의 가수요까지 붙으면서 골판지 시장은 (수요에 비해) 30% 이상 물량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골판지 박스 제조업체들에 따르면 중간재인 ‘원단’ 수급난이 본격화된 건 이달 초부터다. 통상 3~4일이면 들어오던 물량이 3~4주 이상 걸리는 게 다반사다. 경기 용인에서 골판지 박스를 제조하는 S사는 원단이 들어오지 않아 주문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는 “박스를 납품해달라는 전화가 하루에 10통 정도 오는데 7~8건은 기한을 맞출 수 없어 계약을 거절하고 있다”며 “박스 제조업을 한 지 25년이 됐는데 이런 수급난은 처음 겪는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시화공단에서 서울 400여 개 우체국에 소포용 박스를 공급하는 P사 관계자는 “원단이 들어오지 않아 우체국에 보내줄 박스가 납기일보다 평균 열흘 이상 밀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의 한 우체국 관계자도 “이달 들어 종이박스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다 보니 아예 사과 박스를 가져와서 소포를 부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골판지 박스 파동은 연쇄 가격 인상으로 예고됐다. 골판지 원지를 생산하는 태림페이퍼, 대양제지, 신대양제지, 아세아제지, 고려제지 등은 지난달 중순 원지 가격을 평균 25% 올린 데 이어 지난달 말과 이달 초에 원단 가격도 25% 인상했다. 이들 메이저 업체가 원지 생산의 80%, 원단은 70%, 박스는 45%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박스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한 겹으로 된 ‘싱글’지(紙) 원단은 ㎡당 평균 320원에서 400원으로, 두 겹의 ‘더블’지는 420원에서 525원으로 올랐다.
급기야 지난 26일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은 전국 1500여 개 대기업 및 택배·유통기업에 안내문을 보내 “공급난으로 인한 원자재 가격 인상 요인을 연동해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박스 가격 인상 예고다. 이 조합에는 골판지 원단과 상자를 생산해 공급하는 업체들이 대거 속해 있다. 골판지 공급이 달려 제때 생산하지 못하는 영세 박스 제조업체들은 매출 급감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용인의 P사 대표는 “당장 이달에만 매출이 20% 이상 줄었는데 다음달이 더 걱정스럽다”며 “이런 상황이 한두 달 더 이어지면 도산하는 업체가 여럿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골판지 박스 대란은 내수 및 수출기업으로 번질 기세다. 경기 김포에서 주물 부자재를 생산하는 G사의 공장장은 “보통 1주일에 2.5t 트럭 두 대 분량의 박스를 조달받았는데 요즘은 한 대도 받기 어렵다”고 했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연간 대단위 계약을 하는 물류 대기업과 쿠팡 등 대형 e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에까진 본격적으로 번지지 않은 상태지만 골판지의 수급 불균형이 더 심각해지면 물류 시장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정선/민경진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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