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의 처벌을 강화한 새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올해 1월부터 시행됐지만 건설업 등 주요 업종의 사망사고는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주와 법인에 대한 책임을 강화해 산업재해를 막으려는 제도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후 처벌 강화에 대한 정책 검증이 부족한 만큼 사업주의 처벌 수위를 세계에서 유례없는 수준으로 올리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1~9월) 건설업 사고재해 사망자는 349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3명(3.9%) 늘었다. 건설업 사망자 수는 전체 업종 사망자의 52.9%를 차지했다. 전체 업종의 사망자는 660명으로 전년 대비 7명(1%) 줄었으나, 사망 사고 발생 비중이 가장 큰 업종의 사망 사고는 늘었다.
이 같은 통계는 하청 근로자 사망에 대한 원청 사업주의 안전관리 책임 범위와 처벌 수준을 강화한 개정 산안법이 시행된 뒤 나타난 결과다. 산안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 등 사업주 처벌이 강화됐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강화된 산안법이 시행된 올해 들어서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등 대형 산재가 줄지 않았다”며 “산업안전보건과 같은 전문적·기술적 성격이 강한 분야는 기강과 의지만으로는 사고 발생을 줄이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여당 등 일부 정치권에서 제정을 추진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산재 예방 효과에 대한 검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여당 등이 입법을 추진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기업 등이 유해·위험방지 의무를 위반해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와 법인을 형사처벌하는 법안이다. 사망사고 발생 시 사업주에게 3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처벌 수위를 새 산안법보다 대폭 강화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가 2일 주최한 ‘산재예방 선진화를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에선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 사례가 소개됐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진 법이다. 기업 등이 재해 예방 의무를 위반해 근로자가 숨지면 이를 범죄로 규정하고 상한이 없는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빅토리아 로퍼 영국 노섬브리아대 로스쿨 교수는 “기업과실치사법의 산재 억제 효과에 대해 의문이 있으며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 입증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과실치사법은 입법이 마무리되기까지 13년이 걸렸을 정도로 특정 참사에 대응해 성급하게 제정된 법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례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유죄가 나온 기업의 57%는 파산하거나 영업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이근우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은 주요 개념이 광범위하고 책임 범위도 모호한데 대단히 무거운 형벌로 일관하고 있다”며 “법률 제정의 목적이 정당하다는 것만으로는 그 수단의 위헌성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서승원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은 “중대재해처벌법안은 지나치게 사업주 책임과 처벌을 강조해 과잉입법 논란이 크다”고 했다. 그는 “사업주에 대한 처벌 규정은 이미 개정 산안법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만큼 사고 원인을 차단하는 예방 중심 정책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산업안전 전문가인 이상철 변호사는 "중대재해처벌법이 본뜬 영국의 법인과실치사법은 우리나라처럼 대표이사 형사처벌 조항이 없다"며 "영국이 이 법으로 산재 사망율을 크게 낮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할 대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사례를 참고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를 가리키는 ‘사망만인율’은 독일이 0.15로 0.4대인 우리나라의 3분의 1수준이다. 이상철 변호사는 "독일은 산업안전관련 법안에 사업주 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책임도 크게 묻는 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라며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사업주와 근로자가 함께 안전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경진/안대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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