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힘이 세다. 맛에 대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경남 통영은 매력적인 여행지를 품은 명품 여행도시임에도 맛에 대한 기억이 먼저 앞선다. 통영은 누가 뭐라 해도 맛의 고장이다. 통영이 유독 맛있는 이유는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돼 음식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겨울 미식 여행을 생각한다면 청정하고 매력적인 맛의 향연이 펼쳐지는 통영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통영에서 아침 허기를 채우려면 시락국(시래기국)이 제격이다. 이른 새벽 하얀 숨결을 달고 나타난 이들은 배보다 더 허기진 마음을 채우러 시락국을 먹는다.
통영의 새벽시장으로 알려진 서호시장 안에는 시락국을 파는 가게가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 흰살 생선으로 국물을 내는 가마솥시락국과 장어 국물로 맛을 낸 원조 시락국이 많이 알려졌다. 시락국집의 풍경도 음식만큼 이색적이다. 식탁 한가운데 고춧잎, 김치, 섞박지, 무채 등 다양한 반찬이 놓여 있다. 조금씩 음식을 덜어 먹으라는 취지다. 시락국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음식이다. 내 앞에 놓인 반찬을 낯모르는 이와 서로 나누는 정겨운 음식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안타깝게도 사람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식사를 즐긴다.
통영의 시장 음식 중에서 빼떼기죽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빼떼기죽은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서민들이 먹던 지역 음식이다. 겨울이면 고구마를 바짝 말려뒀다가 춘궁기가 오면 죽으로 끓여 먹었다. 말리는 과정에서 고구마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비틀어지는 모습을 보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빼떼기’라고 불렀다. 말린 고구마를 푹 삶은 다음 팥, 강낭콩, 찹쌀가루 등을 넣어 끓이고 설탕, 소금 간을 한다. 통영 사람들은 빼떼기죽을 추억을 환기시키는 맛이라고 부른다.
통영 음식 중 가장 이색적인 것은 우짜다. 우동과 짜장을 한 그릇에 넣어 내놓은 것. 중국식 음식과는 맛이 다르다. 짜장면 같기도 하고 우동 같기도 한 독특한 맛이다.
충무김밥도 빼놓을 수 없는 통영의 맛이다. 할매김밥 혹은 꼬치김밥이라고 불리는 충무김밥은 새벽에 바다 일 나가는 남편이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아지자 김밥을 싸서 남편 손에 쥐여줬지만 여름이면 금세 쉬어버려 못 먹게 됐다. 자른 김에 밥을 둘둘 말아 작게 만들고 반찬으로는 통영에서 흔히 잡히는 주꾸미와 홍합, 호래기, 꼴뚜기 등을 물기 없이 꼬들꼬들하게 무치고 삭힌 무김치를 같이 넣어 김밥을 만든 것이 충무김밥의 시초라고 한다. 통영항 주변에는 충무김밥집이 여러 곳 있다.
섬 전문가인 강제윤 시인은 “다찌는 통영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 통영의 맛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해산물 뷔페이기 때문이라는 것.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이 다 있다. 싱싱하고 감칠맛 나고 물기가 오른 생동감 넘치는 음식 재료가 풍성하게 올라온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주는 곳이 이곳이다. 다만 다찌집에서는 음식을 지정해서 먹을 자유는 없다. 주인이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그날그날 시장에서 사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기 때문에 다찌에 중독되면 약도 없다.
통영의 ‘다찌’는 ‘서서 마시는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치노미(たちの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통영 사람들은 모든 해산물이 ‘다 있지’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통영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지 않고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미식가들이 모인 동네이기 때문이다. 전북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다. 원래 다찌집에서는 술을 한 병씩 시킬 때마다 안주가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형태로 운영했지만 타산이 맞지 않아 요즘은 1인당 3만원 정도를 받는다. 기본을 시키면 소주는 3병, 맥주는 5병 정도가 양동이에 담겨 나온다.
좋은 해산물로 거나하게 한잔했다면 다음날 해장 음식으로 물메기탕만한 것이 있을까. 물메기는 곰치다. 동해안에서는 물곰이라고도 부르는 해장 음식의 제왕이다. 시원하고 담백해 쓰린 속을 금세 아물게 하는 신묘한 물고기다. 물메기는 특히 겨울에 맛있다.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이다. 무를 넣고 지리탕으로 맑게 끓이면 양파나 다른 채소를 넣지 않아도 달고 시원하다.
■ 이곳만은 꼭 가봐요
통영 여행의 트렌드는 단연 서피랑이다. 동피랑 벽화마을도 일품이지만 서피랑은 마을 주민의 웃는 모습을 담은 사진 49점을 마을 곳곳에 설치했다. 서피랑의 명소인 99계단은 벽화와 조형물이 조성된 예술작품 계단으로 다시 태어나 서피랑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변신했다. 아침 산책을 하고 싶다면 삼칭이해변길이 좋다. 백석은 통영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에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미륵도 남쪽 해안인 삼칭이해변길은 바다 풍경의 진수를 보여준다. 통영 여행의 백미는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461m)에 오르는 것이다. 해 질 녘에는 달아공원에서 일주도로를 따라가면서 보는 일몰도 일품이다.
통영=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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