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 노사가 다음주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재교섭에 나선다. 자동차업계에선 양측 간극이 큰 만큼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 노사 갈등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지부는 이날 사측에 교섭 재개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노사는 이달 9일께 교섭을 재개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노사는 지난달 25일 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도출했지만,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53.8%의 반대로 부결됐다. 특히 부평공장에서 반대 목소리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잠정합의안 통과로 이번 임단협 타결을 기대했던 노사는 찬반투표 부결로 당혹스러운 상황이 됐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임금 인상과 부평 2공장 신차 배정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사측과 노조 집행부 사이에는 이러한 요구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현장의 요구사항이 과도하다는 인식은 임단협 잠정합의안 찬반투표 직전 김성갑 한국GM지부장이 내놓은 성명서에도 드러난다. 김 지부장은 성명서에서 "2019년 3000억원 적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 등 여러 악재가 있었다"며 "현실을 냉혹하게 판단해야 한다…불만을 넘어 냉철한 가슴으로 잠정합의안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노조는 당초 임단협에서 △기본급 월 12만304원 인상 △통상임금의 400%에 600만원을 더한 성과급(평균 2000만원 이상) 지급 등을 요구했지만, 잠정합의안에는 △조합원 1인당 성과급과 격려금으로 총 400만원 지급 △T/C 수당 1만원 인상 △부평2공장 현행 차종 생산 일정 연장 정도의 내용만 담겼다. 한국GM이 6년째 3조원대 적자를 냈고, 올해도 흑자전환이 어려워져 지급 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점을 노조 집행부도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대신 노조 집행부는 고용안정에 방점을 찍었다. 부평1공장에 2021년부터 1억9000만달러(약 2100억원)를 투자하고 2공장에서 생산하는 차종의 생산 일정을 최대한 연장하며, 고용 안정성 보장을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창원과 제주 물류센터 통폐합 문제도 특별노사협의를 열어 지속 논의하기로 했다.
노사가 24차례 걸친 교섭 끝에 마련한 잠정합의안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노조 내 강경파 목소리가 커진 탓이다. 한국GM 일부 현장 조직들은 잠정합의안을 두고 "쓰레기를 주워왔다"며 부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잠정합의안 도출이 늦어진 것 또한 강경파의 훼방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사전에 의견을 조율해 노사간 합의가 된 사항들을 강경파들이 다시 문제 삼는 상황이 반복되며 교섭이 길어졌다"고 지적했다.
부평 2공장 구조조정 우려도 강경파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효과를 냈다. 현재 트랙스와 말리부를 생산하는 부평 2공장에는 후속 물량이 배정되지 않은 상태다. 현장 근로자들 사이에는 현행 차량들이 단종되면 군산공장 폐쇄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이에 현행 차량 생산을 연장하고 대책을 논의한다는 집행부보다 GM과 싸워 신차 배정을 받아내겠다는 강경파 목소리에 동조했다는 평가다.
그간 임금 동결이 이뤄진 만큼 이번에는 기본급을 인상해야 한다는 것도 강경파의 논리다. 이들은 회사가 적자인 상황에도 팀장급 이상 사무직 직원들이 매년 성과급을 받아왔으니 생산직도 기본급을 올려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팀장급 이상 사무직이 받은 성과급은 노조가 도입을 거부한 ‘팀 GM’ 임금체계로 인해 GM이 지급한 것이다.
GM은 전세계 실적에서 흑자가 나면 자회사에 이익을 공유하는 팀 GM 임금체계를 운영한다. 적자가 난 자회사에도 이익을 공유해 결속감을 주기 위함이다. 다만 임단협을 거치지 않고 인사고과에 따라 기본급 인상을 결정한다. 호봉에 따른 기본급 인상도 없어 노조는 2011년 팀 GM 임금체계 도입을 거부했다. 또한 팀장급 이상 사무직 직원들은 지난 4월부터 임금의 20%를 유예하고 있고, 임원들은 이에 더해 급여도 5~10% 추가 삭감한 상태다.
부평 2공장 폐쇄 우려의 해결책인 신차배정은 한국GM이 아닌 GM에 결정권이 있다. 다만 한국을 바라보는 GM 본사의 시각은 이미 싸늘해진 상태다. 2018년 군산공장을 폐쇄할 당시도 GM은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항변해왔다. 하지만 올해도 임단협을 둘러싼 부분파업이 발생하면서 "GM에게는 중국을 포함해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연간 500만대를 생산할 방안도 있다"는 철수 시사 발언이 나왔다.
업계는 GM의 한국 철수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군산공장을 정리하면서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철수 가능성이 급부상했다는 점에 우려가 나온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신차 트레일블레이저를 맡겼더니 부분파업으로 공급량이 줄었다. 매년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더는 한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GM의 시각"이라며 "신차 배정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한국GM은 노조의 부분파업과 잔업·특근 거부로 하반기 약 2만5000대의 생산차질을 빚었다. 한국GM은 7월 이후 트레일블레이저를 중심으로 넉 달 연속 수출 증가세를 기록했지만, 부분파업이 벌어진 11월 수출은 전월 대비 53.7% 급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GM은 코로나19 사태로 총 38개 중 34개 공장 가동을 중단한 바 있다. 미국도 공장이 멈춰 직원들이 월급을 못 받았는데 한국 직원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며 "초유의 사태에도 월급이 끊긴 적 없는 공장에서 돈이 부족하다며 파업한 희안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나마도 계속 적자만 냈고 부도 위기까지 겨우 모면한 공장 아니냐. 과거 카젬 사장의 발언도 이런 맥락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은 지난 9월 업계 고위관계자에게 “미국 GM 본사의 시각에서 한국GM 노조의 행태는 용납이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신차 배정은 물론 임금 인상 요구도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듯 한국GM 노조는 사측에 재교섭을 요구하고 잔업과 특근 거부 등의 쟁의행위는 당분간 유보하기로 했다. 또한 기존 잠정합의안에 △단체협약 군산공장 폐쇄 전 수준 회복 △노조원 상대 징계·손해배상 청구 철회 등을 추가로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GM 본사를 자극하지 않고 한국GM의 지급 여력 이내에서 조합원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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