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전의 가장 빠른 '탈 것'은 말이었다

입력 2020-12-07 09:00  


BC 344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에게 그리스 테살리아의 말 장수가 말을 팔러 왔다. 하지만 말이 너무 사납고 거칠어 용맹한 장군들조차 다루지 못했다. 필리포스 2세가 말을 사지 않겠다고 하는데, 열두 살짜리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나섰다. 알렉산드로스는 흥분한 말을 부드럽게 달래더니 가볍게 올라타고 달렸다. 그는 말이 자기 그림자에 놀라 겁먹은 것을 알고,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끔 말머리를 태양 쪽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에 감탄한 필리포스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네게 맞는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너를 만족시키기에 너무 좁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명마 부케팔로스에 얽힌 이야기다. 명장은 명마와 더불어 탄생한다.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요절한 알렉산드로스대왕(BC 356~BC 323)이 그렇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는 알렉산드로스가 부케팔로스를 타고 있는 그림이 있다. 당시 화폐에 부케팔로스가 새겨지기도 했다.

서양에 부케팔로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적토마가 있다. 나관중의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와 관우가 탔던,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다. 주인으로 모신 관우가 죽자 적토는 스스로 풀과 물을 끊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류와 말이 맺은 6000년 인연
말은 라틴어로 ‘에쿠스’라고 부른다. BC 1만3000년께 프랑스 라스코동굴 벽화에 온전한 야생마가 그려졌을 만큼 인류와 말의 관계는 오래됐다. 말이 가축화된 것은 신석기시대인 BC 4000년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다. 개가 BC 1만 년에, 돼지가 BC 8000년에, 소가 BC 6000년에 가축화된 것에 비하면 말은 가축화가 매우 늦은 편이다. 최고 시속 60㎞로 달리는 말을 붙잡아 길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말은 잠도 서서 잘 만큼 경계심이 큰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번 길든 말은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고기를 얻는 식용으로 길렀다. 그러다 BC 2000년께부터 운송 수단으로 이용했다. BC 1000년 즈음에는 전쟁에 동원됐다. 고대 이집트 벽화나 로마제국이 배경인 영화 ‘벤허’에서 보듯이 고대의 말은 주로 전차를 끌었다. 말이 무장한 병사를 태우고 달릴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말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탈것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이동·상거래·문화 교류에서 시간과 공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사람은 걸어서 하루에 기껏 30~50㎞를 이동하지만 말은 100㎞ 이상 갈 수 있다. 실크로드 교역에서도 말은 낙타만큼 짐을 싣지는 못하지만 이동속도는 비교가 안 되게 빨랐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런던 파리 등 대도시는 말들이 하루에도 수십t에 달하는 말똥을 쏟아내어 골치였다. 비가 오면 거리가 온통 말똥으로 질척였고, 전염병이 쉽게 번지게 됐다. 하이힐의 등장과 하수도 정비는 말똥 공해와 관련이 깊다.
전쟁 판도를 가르는 기마대
근세까지도 역사는 말에 의해 좌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난 기동력으로 역사 전면에 등장한 기마민족이 시대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 일이 흔했다. 훈족, 몽골족, 튀르크족 등이 대표적이다. 훈족은 게르만족을 밀어내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했고, 몽골족은 유라시아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튀르크족은 오스만제국을 세워 중세와 근대의 동서양 중간 지대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기마민족의 말과 기마술은 농경민족에도 전해져 어느 나라든 기마대를 갖췄다. 전쟁에서 말은 탱크 장갑차 트럭을 합친 것과 같았다. 말은 전투에서 이기면 가장 먼저 빼앗았을 만큼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수한 기병이 국력 그 자체였고,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전투력이었다.

하지만 고대 전쟁은 보병 위주였고, 기마대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말이 크지 않았고, 낙마 위험이 컸으며 관리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병의 전투력이 급속히 발전한 것은 말 품종 개량과 함께 등자(stirrups)가 발명되면서부터다. 등자는 말안장에 부착된 발걸이다. 별것 아닌 듯해도 기병이 말을 타고 내리기 수월해졌고, 고삐를 잡지 않고도 말 위에서 활과 창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 계급은 등자와 더불어 탄생했다. 프랑크왕국의 샤를 마르텔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이슬람 세력을 투르-푸아티에전투에서 막아낼 때 기마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의 전투는 보병에서 기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1차 십자군전쟁(1096~1099) 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도 기마대 덕이었다. 당시 중무장 기병과 싸워본 적이 없던 이슬람 군대에 기마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몽골은 작지만 강인한 몽고마로 13세기 아시아와 중동, 동유럽 일부까지 휩쓸었다. 말과 한 몸인 듯 움직이며 백발백중 화살을 쏘아대는 몽골 기병을 목격한 유럽인들은 그리스신화의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를 떠올렸다. 몽골족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탔는데 말 위에서 1주일간 먹고 자며 내려오지 않을 만큼 말과 친숙했다. 세계 최강의 몽골 기마대였지만, 말은 험준한 산악지대나 덥고 습한 기후에 약했다. 몽골 군대가 인도를 넘지 못하고 베트남 원정에 실패했으며 고려를 제압하는 데 고전했던 이유다.

중세 1000년간 위력을 떨친 기병도 화약 무기와 총포의 등장으로 급속히 위축됐다. 임진왜란 때 조선 기마대는 왜군의 조총 앞에 무기력했다. 기병은 1차 세계대전까지도 존재했지만 전투 양상이 참호, 철조망, 기관총, 전차로 바뀌면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기원전 4세기 무렵 개발되고 기원후 2~3세기 무렵 동양에서, 8세기 즈음해 서양에서도 쓰인 등자(子)가 전투 양상을 바꾼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②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과 기마대 등 강력한 육군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할까.

③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 시공간을 단축하는 운송 수단으로 자율주행차나 ‘하이퍼 루프(hyper loof)’ 등 외에 또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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