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서비스 회사인 휴렛팩커드엔터프라이즈(HPE)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있는 본사를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한 지난 1일, 미국 경제계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 “다양한 인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휴스턴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HPE의 이전 사유는 실리콘밸리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HPE가 실리콘밸리의 ‘원조(元祖)기업’이라는 점에서 이 회사의 본사 이전 결정은 더 충격적이다. HPE는 1938년 스탠퍼드대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캘리포니아주 북부 팰러앨토에 있는 팩커드의 집 차고에서 오디오 발진기를 개발하면서 탄생했다. 주정부는 차고가 있던 팰러앨토시 애디슨가 367번지를 ‘실리콘밸리 발상지’로 명명하고 사적(史蹟)으로 등록했다.
그런 HPE도 실리콘밸리 일대의 치솟는 집값, 혼잡한 교통과 높은 세금 등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기업에 보다 친절하고 활동비용이 덜 드는 곳을 찾아 다른 주(州)로 떠나는 기업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HPE마저 가세하기에 이른 것이다. 빅데이터 분석 회사인 팰런티어가 올해 초 콜로라도주 덴버로 본사를 옮겼고, 팰런티어 공동창업자인 조 론스데일이 설립한 벤처캐피털 8VC는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이전했다. 클라우드 서비스 회사인 드롭박스도 오스틴 이전을 결정했고,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는 생산공장을 오스틴에 짓기로 했다.
론스데일 8VC 대표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하지만 떠나야 했다(California, Love It and Leave It)’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11월 16일자)에서 실리콘밸리는 물론 캘리포니아주 전체의 열악한 기업 환경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내가 태어났고, 학교에 다녔고, 이후의 삶을 보낸 고향 캘리포니아가 비즈니스와 혁신을 옥죄고, 기회를 박탈하는 나쁜 정책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있다. 아무 인연도 없었던 텍사스로 떠나온 이유다.”
그가 꼽은 ‘기업환경 황폐화’ 사례가 많지만, 졸속적인 ‘녹색에너지’ 정책 강행으로 인한 전력불안정 사태가 특히 눈길을 끈다. “민주당이 주정부와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작년에만 2만5000차례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이 발생했고, 올해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 후진국에서처럼 전기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일도 빈발하고 있다.” 론스데일 대표는 캘리포니아가 현실과 동떨어진 각종 좌파정책 실험장으로 변한 현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주택 공급 부족으로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 집값이 치솟고 있는데도 주정부가 토지사용제한 조치를 고집해 중·저소득층의 주거 불안을 고착화하고 있다.”
더 암담한 것은 “주정부와 의회 지도부가 자기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수용하기는커녕 적대감을 노골화하며 급속한 좌경화의 길을 치닫고 있는 현실”이라고 그는 개탄했다. 주의회를 1997년, 주정부는 2011년부터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캘리포니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자 집단 등의 ‘콘크리트 지지’를 등에 업고 이념정치를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당국은 저소득층을 지원할 재정 확대 등을 명분으로 부유세까지 도입하는 등 개인과 기업에 대한 세금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소득세율 인상은 캘리포니아 납세자의 0.5%, 부유세는 0.1%에게만 적용될 뿐”이라며 주민 간 편 가르기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극소수 부자들’의 세금 부담이 얼마나 편파적인지는 주 전체 소득세 수입의 40%를 상위 0.5%가 짊어졌다는 통계(2018년)가 보여준다. 주민들이 이런 ‘세금폭탄’을 앉아서 받아들일 리 없다. 고소득자와 기업들의 ‘캘리포니아 탈출’이 이어지면서 2018년에만 80억달러의 세수(稅收)가 다른 주로 유출(연방국세청 추정)됐다.
HPE의 본사 이전 결정은 캘리포니아의 ‘황폐화’가 어느 지경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고발인 셈이다. 민주당 소속 샘 리카도 새너제이시장은 “우리 지역의 주거환경, 세금, 규제 부담 등이 심각한 상태임을 돌아보게 됐다. 기업을 적대시하고 고소득자를 악마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는 자성론을 내놨다. 주당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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