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칸트와 오웰이 기겁할 나라

입력 2020-12-09 17:53   수정 2020-12-10 00:32

요즘 들어 독일 계몽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론 칸트의 ‘정언(定言)명령’과 오웰의 《동물농장》이다. 정언명령은 근대 시민사회의 빛나는 도덕률이고, 《동물농장》은 전체주의로 치닫는 ‘권력의 법칙’에 대한 우화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불변의 도덕률로,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가언(假言)명령’과 대비된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싫으면 남도 싫은 것이고, 사람이면 염치를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자유와 책임, 이성과 합리와 더불어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근대정신의 한 축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 법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칸트가 목격했다면 기겁할 듯싶다. ‘G10’을 넘본다는 나라의 정신세계가 참을 수 없이 가볍기만 해서다.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할 불변의 도덕률은 형해화된 대신, ‘내로남불’이 시대정신이라는 판국이다. 그걸 지배 권력이 앞장서 부추긴다. 사리 판단의 잣대가 어제와 오늘 다르고, 진영과 패거리에 더 좌우된다. 일명 ‘조만대장경’으로 불리는, 조국 전 장관이 보수정권 시절 쏟아냈던 독설의 트윗들이 이 시대를 예언이라도 한 듯 1 대 1로 매치된다. 해만 뜨면 온갖 억지와 무리수, 비난과 폄하로 가득한 세상에서 민초들은 살아가야 한다.

오웰도 자신이 《동물농장》에서 그린 묵시적 예언에 딱 들어맞는 나라를 발견하고 기겁할 것 같다. 농장의 지배계급인 돼지들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고 주문을 걸고, 이들을 찬양하는 양들은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더니 어느 틈에 “네 발도 좋지만 두 발은 더 좋다”고 외쳐댄다. 무슨 일이 생겨도 “그래도 옛날보다 낫지 않느냐”고 한다.

올해 70주기인 오웰이 타임머신을 타고 이 땅을 다녀간 듯하다. 오웰은 마지막 문단을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고 끝맺었다. 지금 와서 보면 1984년 새해 벽두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위성생중계로 연 백남준이 다소 순진했듯이, ‘검찰 개혁’을 정치로부터의 독립과 중립성 보장인 줄 알았던 국민도 나이브했다.

칸트와 오웰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정치 권력이 근대 보편가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자각, 권리와 의무, 견제와 균형 같은 것들이 집단논리, 대가 없는 청구권, 방종과 남용 같은 것들로 대체되고 있다. 《1984》의 ‘신어(新語)’처럼 언어도 심각하게 오염돼 간다. ‘개혁’이란 말에서 더 이상 ‘바르게 고친다’는 뉘앙스가 안 느껴진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정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나라에서 ‘국민 노릇’을 한다는 건 웬만한 각오로 쉽지 않다. 갈라치기와 편 가르기가 최고의 정치 책략이 된 지 오래다. 마오쩌둥이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적과 동지’의 구분을 꼽았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란 외피를 두른 ‘민주독재’ 속에서 지식인은 침묵하고 어용은 더욱 범람한다. 가치 전도, 기억 조작, 통계 분식 속에 진실보다 ‘대안적 진실’이 더 잘 먹힌다. 이성과 합리의 자리를 감성과 음모론이 차지할 판이다. 원전에만 ‘탈(脫)’자가 붙는 게 아니다. 탈도덕, 탈공정, 탈염치, 탈지식 등 ‘뒤집힌 사회’의 징후가 너무도 많다.

그럴수록 지배권력에겐 법치,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언론과 감시 같은 민주주의 기본 전제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민주화를 외친 이들이 욕했던 독재 권력과 점점 닮아간다. 이제 대통령은 침묵하거나 모호한 화법 뒤에 숨고, 거대 여당은 ‘하고 싶은 것 다 한다’고 태세를 전환했다. 법을 다루는 기술이 권력의 무기가 되고, 장관들은 정책 실패의 욕받이 악역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임기 4년차가 흘러가고 있다. 이런 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의 진면목인가. 인간 본성, 집단행동의 원리가 변함없듯이 권력의 속성도 불변이다. 오웰은 에세이 《책방의 추억》에 이렇게 썼다. “호언장담을 늘어놓아도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벌레 먹고 방향 잃은 분위기가 풍긴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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