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남규야, 아들아, 막내야, 남규 형, 선배님, 가끔 신생견이 될 때도 있지만 정작 이 이름들을 듣는 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어떠한가. 누군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었는가. 오늘,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냐는 말이다.
코로나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2020년의 어느 겨울날, 그 어느 때보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삶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들은 점점 옅어져만 가고, 우리의 존재감 또한 서서히 희미해져만 간다. 그 속에서 난 내 이름을 들은 것이다. 들어보기 힘든, 귀한 내 이름을 말이다. 18년 인생에서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설었다. 행복했다.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책 《살아있다는 건》에서 저자 김산하는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고. 생명은 다른 생명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완성할 수 있다고. 이 무언가를 할 때가 바로 이름을 부르는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내가 비로소 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그대는 꽃이었는가.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는 않았는가.
그대는 겨울날 꽃이 피지 않는 이유를 아는가. 매서운 칼바람에 추워서도, 코로나가 무서워서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에 그 꽃은 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보는 건 어떠한가. 원래 추운 겨울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옆구리가 더욱더 시린 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예쁜 꽃 한 송이 선물해보는 건 어떠한가.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김남규”라고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건 또 어떠한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된 답례로 그대의 이름을 내가 큰 소리로 불러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밑져봐야 본전이다.
김남규 생글기자(현대청운고 2년) namgyu33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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