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2년 전에 안 된다고 했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규제샌드박스 시행 전 대표사업으로 예시까지 했던 것인데 매번 회의 직전에 별다른 설명도 없이 취소해버리니 답답합니다.”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는 14일 “정부의 희망고문에 이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규제샌드박스가 창업 기업가의 무덤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약사인 박 대표는 2012년 화상투약기를 개발했다. 먼 거리에 있는 약사가 약 자판기를 통해 환자와 상담한 뒤 약을 선택하면 환자는 원격으로 약을 받아갈 수 있는 기기다. 그는 편의점에서 약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상비약을 파는 것보다는 약사가 원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기기를 만들었다.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 환자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2013년 인천 부평에 투약기를 설치해 시운영도 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7년간 규제 문턱을 넘지 못해 제품 출시조차 못하고 있다. 약사가 원격으로 약을 팔 수 없도록 한 약사법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규제샌드박스 제도가 시행되면서 박 대표도 희망을 키웠다. 지난해 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사업으로 화상투약기를 신청했다. 5월 최종 접수과제로 선정돼 9월 1차 사전검토위원회까지 열렸지만 1년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심의위원회 심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코로나19 유행 등의 영향으로 이달 비대면 심의위원회를 열 계획이다. 하지만 기존에 허가받은 사업에 사업자를 추가하는 등의 패스트트랙 안건 일부만 서면으로 처리할 예정이다. 화상투약기 도입은 결국 해를 넘기게 된 셈이다. 박 대표는 “내년에는 또 선거를 핑계로 논의조차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내년에는 1~3월 매달 정식 심의위원회를 열 계획”이라며 “내년에 최대한 빨리 논의하겠다”고 했다.
화상투약기 도입이 계속 미뤄지는 것은 약사단체의 반대 때문이라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약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사단체는 이 투약기가 허용되면 환자들의 의약품 남용이 늘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약지도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안전하게 약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투약기를 사용해도 환자는 약사가 선택해주는 약만 받아갈 수 있다. 복약지도는 영상통화로 대신한다. 환자와 약사 간 대화는 동영상으로 녹화돼 6개월간 보관된다. 화상투약기는 단열재로 밀폐된 데다 냉온시스템이 유지된다. 약국에서 약사에게 직접 약을 사는 것인 만큼 안전하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오히려 약사와 환자 간 불필요한 대면 접촉을 줄여 코로나19와 같은 감염 질환을 차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 때문에 지난달 보건복지부는 공공심야약국 예산 74억원을 반려하면서 대안으로 화상투약기 설치를 제시했다. 약국이 문 닫은 시간 운영하기 때문에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다.
“복지부, 과기정통부, 국무조정실까지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업이 매번 ‘민감하다’는 말 한마디에 밀려납니다. 이익단체의 이권으로 움직이는 정치인이 막아서 사장되는 기업이 한두 곳이 아닐 겁니다. 매달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계약했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더 늦어지면 망하는 것밖에 길이 없습니다.” 박 대표의 말이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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