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은 15일 이사회를 열고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피해 기업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중소기업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씨티은행이 보상금 지급을 결정한 뒤 하루 만이다. 금융권에선 10년 전에 이미 법적 분쟁이 마무리된 사안이 감독당국의 관치에 의해 뒤집힌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신한은행은 이날 이사회에서 보상안을 의결했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배상’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에서 ‘보상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움직이면 미리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지만, 벗어나면 큰 손실을 보는 구조의 파생상품이다.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율이 내릴 것에 대비해 환헤지 목적으로 가입했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큰 피해를 봤다.
작년 12월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6개 은행에 불완전판매에 따른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며 피해 기업 4곳의 손실액 15~41%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나머지 피해 기업 147곳에 대해선 은행에 자율조정(합의 권고)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은행을 제외한 5곳(신한·산업·하나·대구·씨티)은 ‘불수용’ 의사를 나타냈다. 2013년 대법원에서 키코가 불공정계약이 아니라고 판단한 데다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행사 3년, 행위 10년 기준)가 지나 업무상 배임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자율조정을 권고한 기업 147곳에 대해 보상을 논의하기 위해 판매 은행 10곳(신한·국민·우리·하나·농협·기업·씨티·SC제일·HSBC·대구)이 6월부터 협의체를 만들었지만, 그동안 논의가 지지부진했다는 설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씨티은행에 이어 신한은행도 자율조정 대상 기업에 보상 절차를 밟겠다고 나선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배진교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키코 피해 기업의 총 피해액은 1조10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신한은행에서 키코에 가입한 피해 기업은 46개사, 피해액은 2510억원가량이다. 20% 안팎의 보상금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다.
은행들이 태도를 바꿔 보상금 지급에 나선 것은 금감원 압박에 굴복한 사례라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당국의 ‘종합감사’가 부활하고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로 그룹 수장들이 줄줄이 각종 제재심에 호출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다른 민간 은행들도 결국 키코 자율배상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5개 은행이 ‘불수용’ 의사를 나타내면서 금감원이 체면을 크게 구겼다는 해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윤석헌 금감원장은 “키코 배상 문제를 다시 점검하는 건 금융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수차례 밝혔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배상 권고에 대해 “건전한 헤지(위험 회피)가 아니라 투기한 흔적이 발견됐고, 국민 세금으로 배상금을 부담해야 해 배상 결정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키코 보상은 법보다는 금감원장 소신 때문에 투자자의 자기 책임 원칙이 무너진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훈/박종서 기자 daepu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