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선한 영향력 키우는 의사 창업…혁신 DNA 더 퍼져야 "

입력 2020-12-15 15:17   수정 2020-12-15 15:18


“제가 평생 길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한다고 하면 아마도 제 기술을 이용해 10만 명 정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생긴 아이디어로 창업을 하면 수억 명이 수술을 받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죠. 진료하면서 생긴 어려움을 해결했고 이를 보편화해야겠다는 꿈으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남동흔 길병원 안과 교수의 말이다. 남 교수는 2017년 오큐라이트를 창업했다.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결하는 기술을 개발해 이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휴런을 창업한 신동훈 길병원 교수, 이뮤노포지를 창업한 안성민 길병원 가천유전체의과학연구소장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의사 창업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이라고 한목소리로 얘기했다. 단순히 환자만 보는 것을 떠나 창업이라는 방법으로 의사들이 보유한 역량을 더 크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바이오헬스산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창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도 커지고 있다. 국내 대형 대학병원의 연구 역량을 높이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시작한 연구중심병원 사업은 어느덧 8년차를 맞았다. 의사 창업 등을 통해 하나둘 결실을 보고 있지만, 성공 모델을 구축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직접 창업해 기업을 이끌고 있는 남 교수와 신 교수, 안 소장을 통해 의사 창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어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지 소개해달라.

남동흔 길병원 안과 교수(이하 남)

“백내장 수술을 처음 하는 의료진은 숙련된 의료진보단 정교함이 덜해 합병증이 생길 위험이 있다. 이를 줄이기 위해 망막 수술을 할 때 쓰는 도구를 백내장용으로 변형해 수술할 때 빛이 덜 들어가도록 하는 기기를 개발했다. 환자의 눈부심을 줄이고 더 정교한 수술을 할 수 있다. 10년간 연구한 결과물이다. 의사가 이를 이용해 수술하면 합병증이 적게 생겨 결국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

신동훈 길병원 교수(이하 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파킨슨, 뇌졸중 환자 영상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질환을 예측하거나 진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양성자단층촬영(PET) 검사 없이 자기공명영상(MRI)만으로 파킨슨을 조기 진단하는 소프트웨어다. 환자의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파킨슨병에 AI를 적용한 사례가 없어 조기진단 표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성민 길병원 가천유전체의과학연구소장(이하 안)

“근감소증, 만성골수성백혈병, 희귀 난치성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기업이다. 미국 페이즈바이오로부터 신약 후보물질을 이전받아 미국 식품의약국(FDA) 임상 2상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창업 경험이 있는 의사로서 의사 창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3년 전 국회 의장단과 함께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방문했다. 당시 그곳의 학생과 교수, 동문 등이 창업한 회사의 1년 매출을 합친 것이 700조원이었다. MIT는 더 이상 노벨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들은 과거엔 교육만으로도 사회적 혁신이 됐지만 이제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창업이라고 말한다. 회사가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뛰어난 학생에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 창업이다. 국내에도 이런 사회적 담론이 마련돼야 한다. 수술하는 의사는 잘해봐야 평생 몇만 명을 치료하지만 기술적 혁신을 이루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의대에는 이미 기반이 갖춰졌다. 10~20년간 우수한 인력이 들어왔다. 물꼬만 잘 트면 창업을 통해 환자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 길병원 의사들이 창업하는 것은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하고 사회를 근복적으로 혁신하는 방법인 셈이다.”

▷혁신의 담론을 말하지만 여전히 병원이나 대학 내 창업 의사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창업을 장려하지만 아직은 ‘왜 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창업했을 때 병원과 학교, 사회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인식이 필요한데 이런 게 없으니 겸직 허가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창업을 하려면 많은 부분에서 올인해야 한다. 실제 회사 직원이 20명을 넘다 보니 사람만 관리하는 것도 힘들다. 회의는 늘어나는데 주어진 시간은 제한돼 있고 진료가 끝난 뒤 업무를 보는 것으로는 벅차다. 이런 부분에 관한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대학의 평가는 논문 중심이다.

“노벨상을 수여하는 카롤린스카연구소는 400개 넘는 스핀오프 설립에 관여하는 혁신부총장을 두고 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알려진 한 여성 교수는 참여한 스타트업이 여섯 개가 넘는다. 노벨상을 주는 곳조차 창업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동의한다. 논문만 쓰는 것은 자기만족에서 끝난다.”

▷의사의 아이디어를 기업에 제공하는 방식의 협업은 어떤가.

“정부에서 의사를 성직자처럼 만든다. 기업들의 접근 자체가 터부시된다. 이 때문에 위축되는 부분이 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의사는 직접 제품을 만들어본 사람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많다. 대부분의 의사는 아이디어만 제공하면 결과물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아이디어를 구현해 제품이 되기까지 아이디어는 1%밖에 기능을 못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애착을 갖고 책임지지 않으면 제품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장된다. 직접 창업해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협력관계로 조언하는 수준으로는 상업화가 어렵다고 본다.”

▷병원 내 배려도 필요하다.

“진료를 많이 하다 보니 별다른 제약이 없는데 창업 때문에 수술 횟수가 줄어드는 등 영향을 받는다면 매출에 대한 압박이 있을 것이다. 설령 양해를 구하고 창업에 집중한다고 해도 창업 기업의 성공률은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실패도 자산인데 연구개발(R&D)을 하면 모두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창업이 실패로 끝나면 재기하는 문화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하다고 보나.

“거대 담론이 형성돼야 한다. 의사 창업의 방향을 잡는 심포지엄을 여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창업 의사 스스로도 자신의 사명이 뭔지 고민해야 한다.”

“한 우물을 판다면 5~10년이면 분명 기회가 생긴다. 수술하는 의사가 새로운 것을 찾는 건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제 의대에 오는 학생은 능력이 더 좋은 친구들이다. 세상이 바뀌고 변화한다는 데 관심을 둬야 한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과거 진료를 할 때 환자가 너무 많아 이동하면서 봐야 했다고 한다. 바퀴 달린 의자가 없었는데 세운상가에서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게 혁신이다. 길병원의 혁신 도구는 변해왔다. 초기 전자의무기록(EMR)을 도입했고 의학영상정보시스템(PACS)도 국내에서 제일 먼저 도입했다. AI도 마찬가지다. 이런 혁신의 완성이 의료 현장의 연구 결과로 창업하는 것이다. 창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동안 길병원이 해온 혁신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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