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화로 민간 암호화폐를 향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비트코인 가격이 최근 다시 오르기 시작하며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결제용 화폐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가격 변동성이 너무 심하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결제 시간이 지금의 신용카드보다 훨씬 많이 걸린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은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퍼블릭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다.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다 보니 블록을 공유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서 초당 수천, 수만 건의 거래를 처리하기가 어렵다.
최근 이런 한계를 극복한 디지털화폐들이 출현했다. 그중 하나가 ‘디엠(Diem)’이다. 디엠은 페이스북이 내년 1월 출시를 계획하고 있는 암호화폐다. 페이스북은 올해 ‘리브라’를 출시하려고 했는데 법정화폐를 위협할 우려가 있다며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반대하고 규제하자 포기했다. 대신 형태를 대폭 수정해 달러에 1 대 1로 연동된 디엠을 발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디엠 같은 민간 디지털화폐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CBDC가 상용화되면 CBDC가 보편적인 교환 매개체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화폐의 가치는 역사성을 띤다. 금은으로 태환되지 않는 현재 중앙은행의 불환지폐가 가치를 지니며 사용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직전에 사용했던 태환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다. CBDC는 지금의 중앙은행권을 단순히 디지털로 표시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CBDC를 일반 화폐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CBDC를 마냥 환영할 일은 아니다. CBDC는 근본적으로 불환지폐이므로, 불환지폐가 초래하는 폐해가 존재한다. 1972년 부분적으로나마 금본위 체제였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불환지폐 체제로 전환된 이후 세계적으로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절반 이상 구매력을 유지한 국가가 거의 없다. 또 과다하게 발행된 경우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 말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다. CBDC는 헬리콥터식 화폐 공급이 더욱 쉽다.
현 시스템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마이너스금리 통화정책도 가능하다. 물리적 현금이 존재하는 시스템하에서는 중앙은행이 마이너스금리를 책정하면 사람들은 현금으로 보유하게 돼 소비 증가를 통한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CBDC가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가능하게 된다. 중앙은행이 디지털현금에 마이너스금리를 부과하면 사람들이 디지털현금을 보유하지 않고 소비하는 데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힘이 강화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통화를 과다하게 발행한 결과는 재앙이었음을 상기한다면 CBDC는 결코 좋은 화폐제도가 아니다. CBDC를 과다하게 발행하면 사람들은 CBDC 대신 금이나 다른 안정적인 디지털화폐로 옮겨가 사용할 수 있다. CBDC는 교환의 매개체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
CBDC의 더 큰 문제는 ‘빅브러더’의 출현 가능성이다. CBDC가 세금 회피를 방지하고 불법적인 활동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국민의 사생활을 다 들여다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지폐는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디지털화폐는 거래 흔적을 남긴다.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가 쉬워진다.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이 CBDC의 선두주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CBDC, 단순하게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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