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에 쫓겨 브라질에 숨어 있었다. 1942년 2월 22일, 그는 부인과 함께 약물로 자살한다. 카뮈나 하인리히 뵐처럼 그 시대를 견뎌냈더라면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유서를 남겼다. 담백하고 아름다운 유서였다. 그는 ‘개인의 자유’야말로 가장 고귀한 재산이었으며 고향을 잃고 떠돌다 보니 자신은 빛이 사그라져 버렸다고 고백한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그대들은 이 긴 밤이 지나면 떠오를 아침노을을 보게 되길 바랍니다.” 당시 이런 비극은 적잖았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포르투갈로 도피하려다 검문이 너무 심해 스페인 국경에서 모르핀으로 자살했다.
‘머잖아 역사가 될 현재’가 사람을 절망케 하는 시대가 있다. 얼마 전 내 친구가 이 나라를 아주 떠났다. 독신이니 자식 교육 때문도 아니고 무거운 세금이 두려울 부자도 아니지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사라졌다. 마치 이민이 아니라 망명처럼. 더 빼앗길 것이 무서워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긴 사람처럼. 츠바이크의 유서에는 “유럽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은 이후”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히틀러보다는 히틀러를 불러내고 강하게 만든 유럽인들에게 절망했다. 벤야민은 나치의 창궐이 나치의 최면술이 아니라 바이마르공화국 독일인들의 어리석음 때문인 걸 알고 있었다.
비극 앞에서 아무도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자책이 극심할 때 인간은 절망한다. 같은 헌법 아래서 이념이 다른 집단이 집권한다는 것은 정치 안에서 공존이 가능하다. 그러나 헌법이 유린당하고 국체 자체가 사악하게 변질될 때 정치는 전쟁의 국면으로 넘어가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 동조할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뻐꾸기가 오목눈이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자기보다 몸이 더 큰 새끼 뻐꾸기를 키우고 있는 어미 오목눈이새의 끔찍한 광경은 이 나라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혹은 열광하며 저지르는 정치적 야만의 결과물이다. 새끼 뻐꾸기는 오목눈이새의 알과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 죽인다.
“많은 사람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던 공자 말씀은 뼈아프다. 내 벗은 자신의 적이 ‘전두환’이었다면 떠나지 않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두환의 사생아’들의 치세에 전의를 상실했다. 오목눈이새들에게 낙담하고 환멸했다. 뻐꾸기를 숭배하는 오목눈이새들에게 경악하고 탈진했다. 불안을 잠재우려 몰입하는 적개심으로 가득 찬 이 사회는 존경마저 조작되는 사회이며 뻐꾸기들은 그 짓의 전문가다.
떠난 그는 차라리 행복한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오목눈이새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뻐꾸기들의 지배에 마취돼 살아간다. 이 나라가 연성독재로 들어섰다는 말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지식인이 못되는 나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자비로운 독재는 없다. 우리 스스로 나서야 한다.”
시인 천상병은 저 시를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썼다. 그 시대의 참상도 참상이려니와 세상 기준에서 그는 일생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저런 시를 썼다. 우리도 꿈을 꿀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을까. 절망하는 친구에게 속삭일 수 있을까. 이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라고. 죽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이 긴 밤이 지나면 아침노을을 보게 될 거라고. 이 글은 부도덕한 글이다. 나를 위로하려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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