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의 고백

입력 2020-12-24 17:30   수정 2020-12-25 02:06

한 어린 소녀에게 조선 땅은 어머니처럼 따스한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소녀를 예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조선의 어머니들 덕분이다. 그런데 이 여성은 조선인이 아니다. 모리사키 가즈에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다. 모리사키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핍박했던 일본인으로 조선에서 나고 자랐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는 모리사키가 17년간 대구, 경주에서 자라며 자신을 품어준 땅에 대한 애착과 역사·민족적으로 짊어져야 할 원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며 기록한 회고록이다. 그는 “식민지 체험을 적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일회성이 마음에 걸려 후세를 위한 증언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집필하게 됐다”고 말한다.

모리사키는 교사였던 아버지가 대구공립보통학교에서 일하게 되면서 조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잘못된 것을 바꿀 용기를 갖진 못했다. 하지만 조선의 땅을 소유하는 일본인들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란 모리사키는 조선에 대해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패전 후엔 일본 규슈에 거주하며 작가가 돼 당시의 삶을 기록해왔다.

모리사키는 “조선의 마음, 풍물과 풍습, 자연이 나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그가 바라본 당시의 조선은 감수성과 혼종성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조선인은 흰옷을 즐겨 입고 노래를 자주 불렀다. 결혼하는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오면 모두가 구경하며 축하했다. 시장엔 중국인, 러시아인 등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갔다. 책에는 일제강점기 그림엽서와 사진, 지도가 실려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과정도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그는 2001년부터 대구 향토사를 직접 조사하고 복원하려는 시민운동 ‘대구읽기모임’ 사람들과 교류했다. 이 과정에서 박승주, 마쓰이 리에를 만나 한국어로 책을 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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