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국을 아날로그 사회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금융부문만큼은 한국보다 훨씬 빠르고 소비자 친화적이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면 간단한 아이디나 지문으로 대부분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한국처럼 PC나 휴대폰에 각종 보안 프로그램 및 인증서를 깔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거추장스러운 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 장치를 들고 다니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편리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금융 관련 스타트업이 쏟아지는 배경 중 하나다. 온라인 증권 거래 앱인 로빈후드만 해도 아이디나 지문만으로 다른 은행 입·출금까지 일사천리로 처리된다.
한국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공인인증제도가 최근 폐지됐다. 전자서명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다. 제도가 도입된 지 21년 만이다. 반가운 마음에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봤다. 여전히 키보드 보안 등 각종 프로그램을 4~5개 깔도록 요구했다. 과거의 공인인증서는 ‘공동인증서’ 또는 ‘금융인증서’란 이름으로 대체돼 있었다. 금융권이 공동으로 3중·4중의 보안 장치를 만들어 놓고 사고가 터지면 고객 책임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그대로였다.
복잡한 인증은 비단 금융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 상품을 구입하는 건 더욱 까다롭다. 정부는 2014년 국내외에서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천송이가 입었던 코트를 해외 소비자들이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액티브X 등 보안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달 초 공인인증서 폐지와 함께 6년 만에 ‘천송이 코트’의 해외 판매가 가능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반면 한국인들은 클릭 몇 번으로 미국 내 온라인 상점에서 자유롭게 물품을 구입하고 있다. 지난달 말 블랙프라이데이 때 유명 음향 제품이 수시간 만에 동 난 것도 한국인의 구매력 덕분이었다.
공인인증서가 공동인증서로 대체됐다는 소식에 뉴욕 금융권 관계자는 “공인인증서나 액티브X 잔재는 코로나19처럼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게 ‘IT(정보기술) 강국’ 한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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