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걷어낸 유럽의 속살…이민자·빈민문제 등 풀어내

입력 2020-12-29 16:56   수정 2020-12-30 00:40

한국을 넘어 세계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소설적 실험으로 구현해온 김솔 작가가 세 번째 단편소설집 《유럽식 독서법》(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이번 단편집에는 출판사 문학동네가 제정한 ‘2016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표제작인 ‘유럽식 독서법’을 비롯해 모두 8편이 수록됐다. 제목 앞에는 벨기에, 스위스 등 소설의 배경이 된 국가명을 붙여 마치 세계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서쪽에서 시작해 그리스와 알바니아 등 동유럽까지 가로지르며 유럽을 주무대로 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일 것 같은 표제와 달리 내용은 심오하다. 유럽의 전형적인 낭만과 동화 이미지를 과감히 걷어내고 유색인, 이주노동자, 빈민 등의 차별 문제를 다양한 신화 및 종교적 소재와 연결한다. 첫 작품인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는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서 만난 흑인 남성 ‘바이 부레’가 약쟁이 ‘루’와 ‘장’을 만나 끊임없이 속이고 속는 악연을 맺는 내용이다. 상호 착취를 계속하는 이들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모두 이민자다. 바이 부레는 영국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 루는 대만, 장은 벨기에 출신이다.

‘누군가는 할 수 있어야 하는 사업’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열다섯 살짜리 불법 이민자 나우팔은 프랑스 오를리공항 근처에서 발레파킹 일을 한다. 하지만 그는 홈리스들에게 하룻밤 자고 갈 자동차를 열어주고 뒷돈을 챙긴다. 가난한 자들이 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비극을 작가는 뼈아프게 보여준다.

수록작들은 이렇듯 유럽의 사회문제를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고귀한(?) 유럽 시민이 쾌적한 삶을 살기 위해선 난민과 불법 체류자들이 파리의 화장실을 청소해줘야 하는 아이러니와 모순을 김 작가는 특유의 해학으로 관통해낸다. 부정과 불행을 불쾌하지 않게 풀어내는 유머와 희망과 꿈을 생각하게 하는 서사에서 김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고전과 신화, 종교를 엮어 자신이 설계한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길을 소설로 담았다. 유럽의 그 미로 같은 비루한 삶의 길을 직접 관통하면서 김 작가는 유럽의 진짜 얼굴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술적 고귀함이 아니라 보이진 않지만 아무도 탈출할 수 없는 빈곤의 궤도임을 분명히 말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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