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7일 조선왕실문서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 보물 제1513호)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실물과 관련 기록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가로 길이가 25m에 달하는 조선 왕실 최대 규모 문서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점이 평가됐다.
이 문서는 1680년(숙종 6년) 8월 30일 열린 회맹제(會盟祭)를 기념해 1694년(숙종 20년) 제작했다. 회맹제는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다. 이 의식에는 역대 20종의 공신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행사에는 참석대상 489명 중 412명이 참석했다.
회맹제가 거행되고 15년 후에 회맹축이 조성된 것은 숙종 재위 기간(1674∼1720년) 중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권력다툼 때문이었다.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로 대표되는 사건이다. 당시 남인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서인은 1680년 남인이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환국을 계기로 집권해 공신이 됐다. 하지만 9년만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 지위가 박탈됐다. 숙종의 계비였던 희빈 장씨의 원자 책봉 문제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낸 사건이다. 이후 1694년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한 남인이 화를 입는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서인이 재집권에 성공해 공신 지위를 회복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회맹축은 숙종 재위 시 공신 지위 부여와 박탈, 회복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맹축은 회맹제 당시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인 회맹문(會盟文), 공신과 그 후손 등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돼 있다. 말미에는 제작 사유 및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벽한 형식을 갖췄다.
또 옅은 황색 비단 위에 붉은 선을 가로 세로로 치고 그 안에 글씨를 썼다. 가로 길이가 25m 이상인 문서의 양 끝을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으로 덧대고, 위아래를 옥으로 장식한 축(軸, 두루마리의 막대)으로 마무리했다. 문화재청은 "특히 이 회맹축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어람용(御覽用) 회맹축의 제작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인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가 함께 전해져 의미를 더한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문헌상으로 존재가 확인된 회맹축은 1646년(인조 24년)과 1728년(영조 4년)에 제작된 것을 포함해 총 3건이다. 영조 때 제작된 회맹축은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1646년에 제작된 '20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보물 제1512호)는 국새가 날인돼 있지 않다. 문화재청은 "따라서 어람용이자 형식과 내용이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문화재청은 '구미 대둔사 경장'과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구미 대둔사 경장은 1630년(인조 8년)에 조성된 경장(經欌, 불교 경전을 보관한 장)으로, 조선 시대 불교 목공예품 중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된 매우 희소한 사례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은 높이 11m에 이르는 대형 불화 1폭과 각종 복장물을 넣은 복장낭(腹藏囊), 복장낭을 보관한 함을 포함한 복장유물로 구성돼 있다. 특히 괘불도는 조선 후기 우두머리 승려 화가인 유성(有誠)을 비롯해 경상도 지역 화승 23명이 참여해 제작한 것으로,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예고기간 30일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국보 및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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