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에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겼다. 우리 법원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이번 사건은 2016년 접수돼 1심 판결이 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일본 정부가 소송 서류를 받지 않는 등 재판 자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피해자들이 승소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배상이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판에 얽힌 핵심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국내 법원이 외국 국가에 대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있는지 △2015년 한·일 합의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사라지진 않았는지 등이다.
국제법에는 외국 정부가 타국의 국가법 적용을 면제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권면제’ 원칙이 규정돼 있다. 그러나 법원은 위안부 피해자 사건의 경우 해당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본제국의 계획적, 조직적, 반인도적 범죄행위가 당시 한반도 내 우리 국민인 원고들에게 자행됐다”며 “주권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권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19세기 후반부터 (주권면제의) 예외 사유를 인정하는 이론이 대두됐다”며 “주권면제는 항구적이거나 고정적인 가치가 아니고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라 바뀐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일본이 인도에 반한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재판부는 “일본제국은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안소’를 운영했고, 원고들은 10대 초중반에서 20세 남짓에 불과했다”며 “피고는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도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한·일 양국 간 1965년 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합의 적용대상에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 사건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갖고 있는 국내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반면 이번 사건은 일본 기업이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한 사건이라 일본 측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우선 일본 정부가 보유한 국내 자산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해당 자산이 강제집행이 가능한 대상인지도 검토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와의 대화가 불가피한데 결국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가 아닌 일본에 있는 자산을 강제집행하려면 일본 사법당국의 집행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일본 측에서 허락할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날 선고 직후 이어진 기자회견에는 일본과 미국 등의 외신들도 자리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을 대리한 김강원 변호사는 “감개무량하다”면서도 “(일본 정부의 자산 중) 강제집행이 가능한 자산이 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이번 판결은 국제인권법의 인권존중원칙을 앞장서 확인한 선구적인 판결”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같이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한 경우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주권면제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명쾌한 선언”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원고 중 상당수가 유명을 달리해 현재 피해 생존자는 5명에 불과하다”며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정어린 사죄와 추모, 전면적인 법적 책임 이행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3일에는 곽예남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19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를 배상하라며 낸 손해배상 소송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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