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에서 물리학을 배웠다. 물리학을 배우면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당시 일본인 동급생에게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해방 이후 경성대(서울대 전신)에 처음 개설된 수학과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선발된 이유다.
1947년 이 박사는 길거리에서 미군이 버린 미국 수학 학술지를 우연히 주워보게 된다. 학술지엔 당시 수학자 막스 초른이 제시한 미해결 난제가 제시돼있었다. 이 박사는 이 난제를 풀어 초른에게 편지를 보냈다. 초른은 편지 내용을 미국수학회(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에 투고했고, 이 논문은 1949년 미국수학회지에 게재됐다. 한국인 최초로 수학 분야 국제 저널에 이름을 올린 순간이다. 하지만 학술지를 받아볼 수 없었던 이 박사는 1952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논문이 게재된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 박사는 1955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후 연구과정까지 마치자 한국 영사관은 그에게 귀국을 요구했는데, 더 공부하고 싶었던 이 박사는 거부했다. 영사관은 그의 여권을 몰수했고, 이 박사는 결국 한국 국적을 잃었다. 이후 그는 캐나다 시민권을 얻어 활동했다.
이 박사는 수학 분야 중 군(群)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리 군(Ree Group)’ 이론은 세계 수학사에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단순군의 무한한 두 모임을 찾아낸 것이다. 이 같은 업적으로 그는 1964년 캐나다 왕립협회 회원으로 선정됐다.
학계에선 모두가 실력을 인정하는 그였지만, 이 박사는 끝내 한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의 다른 수학자의 도움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가족을 북에 두고 분단의 비극을 맞은 그는 한국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이 박사는 2005년 1월 9일 캐나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는 2006년 그의 이름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2015년엔 광복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 '리 군' 이론을 선정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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