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헌혈, 모두를 위한 나무 심기

입력 2021-01-14 17:58   수정 2021-01-15 00:01

해가 갈수록 노년의 삶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고민이 깊어진다. 옛말에 “예순이 되면 나무를 심지 않는다(六十不種樹)”는 말이 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통용되기 어려운 말이다.

100세 시대 고민의 결은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도보 여행자로 유명한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인생은 60세에 시작한다”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고, 조선 후기 문인 황흠(黃欽)은 80세에 밤나무를 심지 않았던가.

나는 지난 40년간 의료인으로서 조혈모세포·소아 백혈병 연구와 의료 활동에 전념해왔다. 혈액과 관련한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자 했다. 대한적십자사 회장을 맡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동안의 경험과 능력을 살려 우리 모두를 위한 나무를 심으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진 것을 나누고 남을 돕는 삶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고통이 가중되는 시기에 나눔의 정서는 더 절실하다.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헌혈 인구는 더 줄어 지난해 국내 헌혈자는 261만 명으로, 2019년에 비해 18만 명이나 줄었다.

안타까운 것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헌혈에 인색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전체 헌혈자 중 중장년층(3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4년 21.9%에서 지난해 44%까지 올랐지만, 70%가 넘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헌혈 가능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반면, 암과 중증질환 환자의 증가로 수혈을 필요로 하는 고령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현 추세가 지속된다면 혈액 수급의 어려움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만 16세부터 69세까지 누구나 헌혈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유독 한국에서는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의 헌혈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지난해 12월 ‘올 한 해를 반성해 봅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다. 200회 가까이 헌혈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메일을 보낸 이는 적은 나이가 아닌 듯하다. 헌혈 200회를 채우는 것이 작년 목표였으나 코로나19 때문인지, 게으름 때문인지 196회밖에 하지 못했다며 2021년에는 더 분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짧은 편지였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웃 사랑의 실천이자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행위인 헌혈을 자녀 세대에게만 맡겨 놔선 안 된다. 공동체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일에 헌신하는 이가 따로 있고 수혜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나무심기와 같이 다음 세대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중장년층이 헌혈에 적극 동참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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