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고 9년간의 회장직 수행을 마무리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제 골프팬으로 남아 K골프 발전에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지난주 서울 재동 보헌빌딩에서 만난 허광수 대한골프협회(KGA)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허 회장의 부친은 1999년 작고한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이다. 허 회장은 1950년대부터 아버지와 같이 살던 집터에 사옥을 지었다. 그는 “막내아들인 저를 유독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뒤를 따르다 보니 후회 없이 살아온 것 같다”며 상념에 잠겼다.
1층 로비는 수많은 골프대회 시상식 사진으로 가득했다. 사진 가운데에는 부친의 초상화가 있다. 허 회장 부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골프 가문을 일궜다. 1976년부터 9년 동안 KGA 회장을 맡았던 아버지에 이어 허 회장도 2012년부터 9년간 KGA 회장으로서 골프계를 이끌어왔다.
허 회장은 KGA가 한국 골프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인으로는 영국왕립골프클럽(R&A) 1호 회원인 부친이 ‘화수분 K골프’의 토대인 국가상비군 시스템을 마련했고, R&A 2호 회원인 그는 이를 한층 더 강화했다는 평을 듣는다.
허 회장이 역점을 뒀던 것은 올림픽이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박세리(44) 최경주(51) 등 한국 골프의 전설들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선수촌 대신 독립 숙소를 꾸렸고, 파격적인 포상금(금메달 3억원, 은메달 2억원, 동메달 1억원)을 내걸어 선수들의 승부욕을 북돋웠다.
“리우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16년 만에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합류한 골프에서 우승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메달 기대주이던 박인비 선수가 부상으로 슬럼프를 겪고 있어서 걱정했지만, 기우였습니다. 금메달로 K골프의 위상을 만방에 알렸죠. 3억원 이상의 포상금을 줘도 아깝지 않을 활약이었습니다. 회장이기 앞서 골프선수 선배로서 아주 자랑스러웠어요.”
그는 아시아·태평양골프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골프 행정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아마골프를 평정했던 실력자이기도 하다. 1969년 한국오픈 아마추어 부문에서 우승컵을 들었고, 1974년에는 한국아마추어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고·경복고 동문 대항전이 열리면 허 회장의 스코어를 빼고 결과를 계산할 정도였다. 주변에선 프로 전향을 권유했지만 그는 “운동선수로 성공할 정도의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몸을 낮췄다. 아이스하키에서도 국가대표를 지낼 정도로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광수가 나오면 우린 안 나간다’고 농담하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3형제 중에 공부는 몰라도 운동신경만큼은 제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다만 프로가 되기엔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쨌든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사업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봤습니다. 지금은 1년에 두 번 에이지 슈팅(자기 나이와 같거나 낮은 스코어)을 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허 회장의 스포츠 사랑은 기업활동에서도 묻어난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시절 골프로 만든 인맥으로 나이키 창업주인 필 나이트와 친구가 됐고 사업으로도 큰 인연을 맺었다. 그 덕분에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팔리는 나이키 신발의 80%를 제조해 수출했다. 미국 애리조나로 직접 찾아가 5년간의 설득 끝에 1985년 핑의 한국 진출을 이끌어 냈던 일도 골프계에선 유명한 일화다.
개최가 불투명한 도쿄올림픽은 임기를 마치며 남은 유일한 아쉬움이다. 그는 “1년 전부터 협회 직원들과 대회장을 찾아가 라운드를 돌며 모든 준비를 마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온 도쿄올림픽을 직접 치르지 못하고 물러나는 게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는다”며 “코스가 짧은 편이라 대회가 열린다면 여자 골프는 물론 남자 골프에서도 메달이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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