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헌법이 범한 실수

입력 2021-01-21 18:00   수정 2021-01-22 00:05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가 결정한 것이면 무엇이든 정당한 입법이며 정책이라고 여긴다. 해고자·실업자도 노조원이 될 수 있게 하는 노동법 개정,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빼앗는 부동산 규제도 의회의 다수가 결정했기에 정당하다고 한다. 이익공유제 등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입법 역시 의회 다수의 지지를 내세운다. 표현·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5·18 왜곡처벌법,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밀어붙인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다수의 결정에 어떤 제약도 없다. ‘자유주의’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다.

이쯤에서만 봐도 민주주의는 ‘합법적’으로 우리를 자유 없는 노예의 길로 안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우리에 갇힌 짐승과 같다. 우리 사회가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안겨준 게 겨우 이런 전체주의적 독재란 말인가. 민주화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니다. 1980년대 5·18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시민과 젊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면서 쟁취한 게 아니던가.

다들 민주화만 되면,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시민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자들을 주기적으로, 보통·비밀선거를 통해, 다수결로 뽑는 민주주의만 실현된다면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왜 민주주의는 그런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는가. 민주주의를 제멋대로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족쇄 풀린 민주주의의 한계다. ‘민주적 절차’만 지킨다면, 국가권력에 대한 일체의 제한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 인식이 1987년 개헌의 기초가 됐다. 그래서 현행 헌법 아래서 선출된 정부의 권력은 거의 무제한적이다.

헌법이 선출된 정부에 무제한의 권력을 허용한 이유가 있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훌륭한 인물을 선택하면 국리민복에 헌신하리라는 플라톤·헤겔주의적인 낭만적 생각이 배경에 있다. 선출된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장치 마련에 소홀했던 것도 그런 낭만적 국가관 때문이었다. 선출된 권력은 원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개인의 자유는 현행 헌법에서 읽을 수 있듯이 대폭 제한돼 있다. 이런 낭만적 국가관은 치명적이다. 국가는 천사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제한하지 않으면 선출된 권력도 왕이나 군주처럼 그 권력을 확대하면서 남용하기 마련이라는 자유주의적 인식을 헌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 실수를 오래전에 저지른 게 유럽국가다. 왕이나 군주의 주권이 국민주권으로 전환되면,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의 보장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선출된 정부라고 해도 정부는 선한 척하고 지적으로 자만해 개혁만능주의의 망상에 빠진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수도 없이 경고했다.

국가권력의 확장과 오·남용에 대한 자유주의의 경고는 민주주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적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된 법의 지배, 권력분립 등과 같은 자유주의 원칙은 경시됐다. 우리의 헌법도 동일한 실수를 범했다. 그 실수의 결과가 전체주의적 독재의 길을 열어놓았다. 민주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민주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해 막지 못한 헌법 탓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 위기 원인은 ‘헌법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왜 하필이면 헌법인가? 헌법은 민주주의 작동을 위한 정치질서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헌법이 잘못돼 있으면 자유나 소유를 유린하는 법과 정책이 생겨나고 독재나 전체주의를 불러들인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진통은 ‘헌법의 카오스’라 할 만하다. 헌법은 국가 권력 구조뿐 아니라 권력 제한의 문제도 다룬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자유에 봉사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 즉 자유의 헌법이다.

오늘날 합법적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나치 히틀러의 독일이 그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 폴란드 등이 그렇다. 이들 국가 모두 국민이 선출한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울 수 있는 효과적인 헌법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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