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주제와 연출, 음악 삼박자 어우러진 명연

입력 2021-01-24 11:07   수정 2021-01-24 11:09

1940년대 영화에 홀려 촬영장을 누볐던 박군. 그는 이화여전(현 이화여대)을 중퇴했다. 성별을 바꾼 건 아니다. 당시 영화계에서 여성 스태프는 낯선 존재였다. 직책으로 부르기도 어색해서 박군으로 지칭했다. 박군은 1955년 영화감독 박남옥이란 어엿한 이름을 얻었다. 여성 최초로 영화 '미망인'을 찍고 나서다.

국립극장은 이름조차 생소한 영화감독을 재조명했다. 지난 20일부터 5일동안 달오름극장에서 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의 막을 올린 것이다. 산하 단체 세 곳(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1년 이후 10년만에 뭉쳐 선보인 공연이다.


공연 극본을 쓴 고연옥 작가는 "박 감독이 겪었던 어려움은 현대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며 "그의 행보는 한 인간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 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작가 의도를 충실히 보여주려 극은 간결하게 전개됐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성차별 장면을 줄였다. 대신 인간 박남옥에 집중했다. 영화 '미망인' 촬영 현장과 박남옥 감독의 과거 회상 장면을 번갈아 보여줬다. 분량을 비슷하게 나눠 청중들이 박남옥의 일생에도 시선을 두게 한 것이다. 박남옥이 촬영 현장에서 아이를 들처메고 밥을 짓는 장면은 1분도 채 안됐다.

음악극이지만 몰입도를 높인 건 대사였다. 고 작가는 박남옥 감독이 투포환 선수였던 사실을 활용했다. 육아에 대한 책임, 가난, 여성이라 펼칠 수 없는 꿈 등을 투포환에 비유했다. 극중 박남옥은 투포환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며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멀리 던질 수 있지요"란 대사를 극 사이사이 읊었다.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의기투합하는 장면도 남다르다. 극중 출연진들은 "미망인이라고 쉽게 보고 껄덕대는 놈들 많은데, 여성 감독이 쓴 미망인 이야기니깐 좀 다르겠지"라고 외쳤다.

대사만으로 시대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구경꾼들이 "요즘은 영화감독이 밥도 짓네"라고 말하고, 과거를 돌이키는 씬에선 이화여전 기숙사 사감이 "장관 부인이면 족할 일이지, 영화는 무슨 영화"라 지적했다.

주변인들 비아냥에 대응하는 박남옥은 뻔한 캐릭터는 아니다. 고 작가는 주인공 박남옥을 억척스러운 여성이나 슬픈 상황에서 마냥 해맑은 캔디로 그리지 않았다. 누구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들로 비췄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평범한 인간이다. 다른 점은 한 가지. 극에서 독백을 통해 자신의 원대한 꿈을 관객들에게 꾸준히 고백한다.

대사는 많았지만 집중하기 수월했다. 연출가 김광보는 박남옥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영화 촬영 시점을 번갈아 배치했다. 극 중 시공간이 바뀌는 속도를 높인 것이다. 소품 활용을 절제하고 무대 뒤로 배경 영상을 투사했다. 관객들이 주인공과 배경에만 집중하도록 의도해서다.

연출진의 노련미가 돋보였다. 나실인 작곡가는 1950년대를 노래로 풀어냈다. 미국 대중음악과 국악이 혼재했던 시기다. 배우들은 창을 하듯 대사를 흥얼거렸다. 객원 출연자인 소리꾼 김주리를 비롯해 국립창극단원들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배경에 대한 설득력을 높였다. 반주도 배경 설정에 힘을 보탰다. 국악관현악과 밴드 앙상블 합주가 절묘했다.

연출·대사·음악까지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니 공감대가 형성됐다. 박남옥의 분투기가 먼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다. 결말도 현실적이다. 해피엔딩은 없었다. 영화 흥행은 참패했고, 박남옥은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받는다. 포대기에 들쳐업은 박남옥에게 주어진 건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란 이름표 뿐이다.

비극으로 끝나진 않는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남옥은 다시 투포환 자세를 취하며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멀리 던져버릴 수 있죠"란 대사를 읊었다. 영화감독으로서 실패해 좌절한 건 결코 아니다. "그래도 해냈다"라는 감정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 대사가 주는 울림은 컸다. 현대 여성들이 짊어진 투포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적나라한 차별이 아니다. 주변인들의 말, 시선이 쌓아올리는 짐더미에 가까워서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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