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100년 기업을 꿈꿨는데, 요즘엔 사업하고 싶은 의지가 사라집니다. 주변 사장들 대부분 제조업을 어떻게 탈피할까 연구중입니다.”
수도권 국가산업단지에서 삼성전자 등에 납품하는 매출 500억원 규모 제조업체 A회장은 최근 “창업자로서 기업할 의지가 안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회사는 코로나 사태에도 작년 매출이 10%이상 성장한 ‘잘나가는’첨단 제조업체다. 그는 “예전엔 아무것도 모르고 연구 개발에만 매진하고, 직원들 월급 올려주는 재미로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중대재해처벌등에 관한법률(중대재해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100년 기업을 육성하려는 꿈을 접었다고 한다. 그는 “이제 공장내 사고가 나면 사장이 징역형 처벌을 받게 되고, 회사를 키울수록 리스크가 커지게 된다”며 “교도소 담장위를 겪는 기분"이라고 했다. 또 “각종 리스크로 원가 부담만 커져 한국 제조업체가 글로벌 경쟁에서 불리해지고 있다”며 “중국과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정치인들은 모를 것”이라고도 했다.
25일 통계청과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11월 중소 제조업 취업자수는 전년 동월대비 10만4000명(2.9%) 급감한 351만1000명을 기록했다. 12월 감소폭은 11만9000명(3.3%)으로 더 커졌다. 지난해 8월 3만명대로 감소했다가 9월 6만명대, 10월 9만명대로 감소폭이 점차 급증한 것이다. 2015년 중소제조업 취업자수 통계가 집계된 후 지난해 11~12월과 같은 큰 폭의 감소는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더구나 중소기업에서 사업부진이나 조업중단에 따른 일시 휴직자도 35만2000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취업자수로 집계된 35만2000명 역시 향후 실업자로 전환될 경우 취업자수 감소폭은 더 커질 전망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한국 제조업의 회복 탄력성이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중소 제조업체들은 숙련공들이 많아 다른 기업, 다른 업종과 달리 쉽게 인력을 감축하지 않고, 고용안전판 역할을 해왔다”며 “포스트 코로나시대가 오면 중소 제조업체들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견인해야할텐데, 이렇게 취업자수가 감소하면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자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염려된다”고 말했다.
중소 제조업 취업자수는 지난해 2월만 하더라도 전년 동월 대비 1만2000명 증가하는 등 중소기업은 코로나 사태에도 우리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중소기업 수출 증가율(전년 대비) 역시 2분기에만 감소했을 뿐 1분기(1.7%)와 3분기(3.6%), 4분기(7.9%) 모두 증가세를 보여 전체적으로 0.2%만 감소해 코로나 사태에도 선방했다는 평가다. '코로나 위기때 숨은 영웅, 제조업'(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 '우리 경제의 구원투수, 중소기업'(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의 평가가 나왔다. 중소 제조업은 대기업 제품 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기초 부품이나 근본이 되는 뿌리기술 제품을 납품하는 곳이 대다수다. 이런 중소제조업체의 취업자수가 최근 두 달 10만명이상 연속 급감한 것에 대해 '비상 상황'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중소기업 취업자수는 줄기는 쉬워도 다시 늘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는 “중소기업들은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제, 중대재해법, 화평 화관법 시행 등으로 규제 비용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코로나 사태로 사업 전망도 불투명하다고 여겨 인력을 대폭 감축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통 중기 제조업체 취업자수는 향후 경기에 대한 후행지표 성격이 크지만 앞으로 중소기업 성장 가능성에 대한 선행지표 성격도 있다는 것이 임 교수의 분석이다.
제조업 기지인 전국 산업단지에선 공장이나 공장내 설비를 처분하는 사례도 급증했다. 제조업 기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전국 1200여개 산업단지 내 공장처분건수는 2019년 1484건에서 2020년 1773건으로 19.4% 급증했다. 공작·가공·금형기계 등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공장설비를 처분하는 사례도 급증하는 추세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중고 기계설비 거래사이트에는 작년 한 해에만 휴·폐업 등의 이유로 636건의 매물이 나왔다. 2019년(429건) 대비 48.3% 증가한 수치다.
산업단지내 가동률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이후 최저치를 찍은 상태다. 한 제조업체 B회장은 "현재 공장 가동률이 정상적인 수준의 3분의 1수준인 30~40%대"라며 "우리는 주 2회밖에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데, 산단에서 그나마 잘나가는 기업이 주 3회 가동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국가산단 평균 가동률은 77%로, 낮은 가동율을 보인 산단은 대구(53%), 시화MTV(첨단업종, 59%), 구미(61%) 등이었다. 근로자 50인 미만 기업 평균 가동률은 63%에 불과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많은 중소기업이 몰린 수도권 3대 국가산단인 시화,반월,남동의 경우에도 61~64%수준을 머물렀다.
치솟는 원자재 가격과 유가 인상, 미·중 무역분쟁 등도 중소제조업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예컨대 주물업체들의 원료인 고철 가격은 2019년 12월 kg당 385원(경남지역 기준)이었으나 1년만인 지난해 말 555원으로 44% 뛰었다. 중국이 코로나 사태 이후 다시 제조업 가동을 늘리면서 철광석 등 원자재를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인상도 가파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54.19달러를 기록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최저 수준이었던 지난해 4월 22일의 13.52달러에 비해 네 배나 급등한 수치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당국자의 시각과 달리 잇따른 '친노동조합'정책들은 중소기업에 직격탄을 안겼다. 중소 제조업체 취업자수가 급감한 것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영향이 가장 컸다는 분석이다. 최저임금은 2018년 16.4%, 2019년 10.9%급등했다. 중소기업의 납품대금은 제자리 수준이고 영업이익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회사 존립 자체를 흔드는 타격을 줬다. 최저임금이 두 자릿수로 급증한 2019년 이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한 기업들이 속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가산동에 있는 한 제조업체 사장은 ”하도급업체 급여를 주기도 빠듯해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 설문조사 결과 최저임금 인상시 '신규 채용을 축소하거나 감원하겠다'고 밝힌 중소기업이 60%에 달했지만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2021년 최저임금'도 인상됐다.
올해 1월부터 50인 이상 300인 미만 중소기업 2만7000여곳에 확대 시행된 주52시간제 역시 큰 부담이다. 7월부터는 5인이상 50인 미만 영세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대기업에 납기 준수가 어려워진데다 ‘잔업수당’과 ‘야근 및 휴일수당’ 등 초과 근무 수당이 없어지면서 숙련공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것도 이 규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 사업장에서 일한 후 다른 사업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거나 '회사쪼개기','직원 빌려주기','다단계 협력사' 등의 편법도 성행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밖에 수억원 규모의 공장 리모델링 비용과 등록비용이 필요한 화학물질관리법과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도 중소 제조업체에 큰 부담이다. 여기에 치솟는 원자재 가격과 높아진 환율과 유가 변동성, 미중 무역분쟁 등도 중소기업 경영의 불투명성을 높여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정화 한양대 창업융합학과 교수는 “국내 제조업을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 지고 있는데 정부는 제조업을 더 어렵게 하는 각종 규제만 쏟아내고 있어 걱정스럽다”고 진단했다.
정부 정책에서도 중소 제조업체는 상대적으로 소외 받았다는 의견이 많다.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대해선 잇따라 정책이 나온 반면, 중소 제조업체에 대해선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조업을 위한 대표적인 정부 정책은 스마트 공장 구축과 연구개발(R&D) 지원이었지만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만 해당돼 뿌리기업이나 영세 제조업체들은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고용유지지원금 특례제도 제조업에 대해선 조선과 항공 등 일부 제조업종에 대해서만 혜택을 주고 있다. 중소 제조업체는 전국에 56만개로 334만명이 종사한다. 중기부의 정책적 지향점에서도 전통 제조업체는 뒷전이라는 분석이다. 중기부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뽑은 예비유니콘 42곳(지난해 10월 기준) 가운데 플랫폼 연관 스타트업이 27개사로 64.26%를 차지한 반면, 제조업 관련 스타트업은 11개사로 26.1%에 머물렀다.
올해 전망은 더 좋지 않다. 중소기업연구원은 중소기업의 2021년도 경영실적이 2020년 대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을 중심으로 실적이 좋아지고, 자동차, 기계 등 전통 제조업은 실적이 나빠지는 'K자형 양극화'현상도 심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노민선 단장은 "올해 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일반 중소기업과 혁신형 중소기업으로 구분해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중소제조업에 대한 체질 개선작업도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들도 많다. 노민선 단장은 “외국인 근로자 수급문제와 함께, 일터 환경 개선 및 생산성 향상 등이 중소제조업체에 가장 큰 과졔”라고 강조했다. 중소 제조기업들은 뿌리기업을 중심으로 올해 3만7700여명의 외국인을 정부에 신청했지만 어느정도 공급이 이뤄질 지는 미지수다. 작년의 경우 중소기업이 신청한 외국인 노동자의 10%수준인 2300명만 입국했다. 장기적으로 국내 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근무여건 개선과 생산성 향상도 장기 과제로 떠올랐다. 임채운 서강대 교수는 "중소 제조업체 고용인력이 점차 고령화 되고 있는 반면 젊은 구직자들이 기피하고 있어 심각한 인력수급상 미스매칭이 발생하고 있다"며 "젊은 구직자들이 중소 제조기업에 취업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각종 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정부도 중소기업의 일터 환경개선을 위한 지원 정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지적했다. 노 단장 역시 "설비 투자와 제조 혁신 등을 통해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주영섭 고려대 공학대학원 석좌교수(전 중소기업청장)는 “국내 제조업이 망가지면 서비스업도 타격을 받고 수출 의존도가 큰 경제 전반이 흔들리게 된다”며 “독일, 미국, 영국이 다시 제조업을 강화하는 흐름을 참고해 정부가 제조업의 실질적 부흥정책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대규/이정선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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