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등장한 시민 권력과 허약한 국가 경제는 권위주의 시대의 일사불란한 통제 시스템을 대신하지 못했고, 다양한 이해집단 간 조정자 집단이 부재하면서 스스로 분열하고 무너졌다.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는 내전으로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모로코, 요르단 같은 절대왕정 국가도 모두 살아났다.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출범한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정권도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군부 쿠데타로 과거로 회귀했다. 최초의 민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는 군사정권의 사법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문제의 근원은 코로나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 경제 파탄으로 인한 생활고였다. 물과 전기가 끊기고, 제조업이 붕괴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민주, 자유, 인권이란 명분과 구호도 의식주 해결이라는 기본적인 생존권 앞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지금 시위가 한창인 튀니지만 해도 관광과 제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국가 경제의 생명인데,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튀니지 재정 적자폭은 국내총생산(GDP)의 11.5%에 달해 최근 40년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도 25세 미만 튀니지 청년 3분의 1이 실업상태라고 보고했다.
튀니지는 아랍 민주화가 가장 성공한 나라로 손꼽혔다. 공정한 선거를 통해 민주정권이 탄생했고, 민주화의 초석이 됐던 튀니지 시민단체연합인 ‘4자 대화기구’는 201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런 튀니지마저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에 휩싸이면서 ‘아랍의 봄’이 아니라 다시 차디찬 ‘아랍의 겨울’로 돌아가고 있다는 냉소가 아랍 전역에 퍼져 있다.
정치적 혼란과 부패, 경제실패에 이어 아랍의 봄이 좌초한 또 다른 요인으로는 SNS 같은 온라인 매체의 역기능을 꼽을 수 있다. 2011년 아랍 민주화 시위의 성공은 SNS 혁명이라 일컬을 정도로 젊은이들의 분노를 응집하는 결정적 매체 역할을 했다. SNS의 위력과 시민 연대의 힘을 경험한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SNS를 통제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왔다. 그 결과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은 아랍 권위주의 정권들과 협력하면서 오히려 시민들을 통제, 감시하고 연결고리를 와해한다는 비난에 휩싸이고 있다. 가짜뉴스와 정보 혼란을 야기해 건강한 시민사회 담론을 왜곡하고, 개인정보에 무차별 개입함으로써 시민들의 결집된 분노와 시위를 방해하는 데 SNS가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아랍 민주화가 성공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첫째는 국제사회의 개입과 대리전쟁을 막아야 한다.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외국 세력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전에 깊숙이 개입해 갈등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랍 각국이 정파와 부족집단의 단편적 이해관계보다 국익과 미래 세대를 위한 양보와 대타협을 우선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가 경제 원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압박을 통해 민주화가 안착될 수 있도록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기대치가 옅어지면서 아랍의 봄은 또 다른 10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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