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디지털화가 빨라지는 혁신의 시기에 최고경영자(CEO)로 ‘집’에 돌아온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위기에 몰린 ‘반도체 왕국’ 인텔의 차기 CEO로 오는 15일 취임하는 팻 겔싱어의 소감이다. 겔싱어는 과거 인텔에서 30여 년간 몸담으며 최고기술책임자(CTO), 수석부사장 등을 지낸 ‘기술통’이다. 그는 시장점유율 하락과 기술 개발 정체를 겪고 있는 인텔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겔싱어는 취임 전부터 회사 경영을 챙기기 시작했다. 최근 인텔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 나와 “2023년 대부분의 반도체 제품을 자체 생산하겠다”며 “우리는 명백한 선두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형 고객사가 잇따라 ‘탈(脫) 인텔’을 선언하는 것 역시 위기를 키우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 최강자인 아마존은 자체 CPU를 개발해 쓰고 있다. 한때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이뤘던 마이크로소프트(MS)도 자체 반도체 개발을 추진 중이다. 애플은 맥북(노트북)에 자체 CPU(M1)를 장착하기로 했다. 최근 미국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서드포인트는 인텔에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등 근본적 변화를 검토하라”며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압박하기도 했다.
인텔 이사회가 겔싱어를 ‘구원투수’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재무 담당자 출신인 밥 스완 인텔 현 CEO보다 기술자 출신인 겔싱어가 인텔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적합할 것”이라고 했다. 2019년 1월 임명된 스완 CEO는 2년 만에 물러나면서 인텔 역사상 최단기간 CEO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1962년생인 겔싱어는 펜실베이니아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다. 그는 경제전문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돼지와 소를 돌보기 위해 동트기 전에 일어났다”며 “동물들에게 발길질을 당하지 않는 게 아침의 주요 임무였다”고 회상했다. 학창 시절 수학과 과학 성적이 뛰어났던 겔싱어는 인텔 채용 담당자의 눈에 띄어 1979년 인텔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은 17세 때 일이다. 그는 인텔의 장학 프로그램과 유연근무제 등을 통해 1983년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2년 뒤 스탠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전설적인 컴퓨터 학자인 존 헤네시 알파벳(구글 모회사) 회장이 스탠퍼드대에서 겔싱어의 석사 지도교수였다.
겔싱어는 인텔에서 386 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앤디 그로브 전 인텔 CEO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나의 경력을 결정 지은 순간”이라고 회상한다. 겔싱어는 이후 수십 년간 그로브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무어의 법칙’(반도체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으로 유명한 고든 무어도 겔싱어의 멘토 가운데 한 명이다.
겔싱어는 인텔의 486 프로세서 개발에 참여한 뒤 2001년 39세의 나이로 인텔의 첫 CTO가 됐다. 2009년 수석부사장에 오르며 차기 CEO로 거론됐지만 회사를 떠나 클라우드컴퓨팅 기업 EMC, VM웨어 등에 몸담았다.
반도체업계에서는 겔싱어가 취임하면 인텔의 경영 전략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자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면서도 일부 제품은 TSMC, 삼성전자 등 외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활용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겔싱어는 2019년 경제전문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변화의 물결 앞에 서지 않는다면 방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파도에 맞선 방향으로 올라타서 그 에너지를 당신 앞에 끌어와야 한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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