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으로 ‘봄이 일어서는 때’라지만 아직은 계절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 어제와 오늘 전국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고 찬바람에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다. 옛말처럼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 터진다” “입춘을 거꾸로 붙였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속담 또한 그냥 나온 게 아닌 듯하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입춘날 농가에선 보리 뿌리를 뽑아 한 해 농사의 향방을 헤아렸다.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 두 가닥이면 평년, 한 가닥이면 흉년을 예상했다. 호남에서는 “입춘날 눈이 오면 그해 며루(자방충)가 쓰인다”고 하여 해충을 걱정했다. 하필이면 오늘 저녁부터 내일 새벽까지 최고 15㎝의 눈이 쏟아진다니, 농사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한파 속에서도 들판과 땅 밑에서는 생명의 뿌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해 서리 내리는 상강(霜降) 때 파종한 보리도 부지런히 뿌리를 뻗고 있다. 이 무렵에는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느슨해진 흙과 싹이 제자리를 잡는다. 동토(凍土)에 뿌리내린 보리 낟알이 혹한을 견디며 서서히 줄기를 밀어올리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보리 뿌리만이 아니다. 가계와 기업, 나라 살림도 뿌리가 튼실해야 한다. 국가를 경영하고 경제를 살리는 일은 농사짓는 것과 닮았다. 곡식을 잘 키우려면 흙·햇빛·물 세 가지를 잘 맞춰 줘야 한다. 흙속의 많은 미생물은 토양을 풍요롭게 한다. 햇빛과 물은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필수적이다. 거름도 제때 적당한 양만큼 줘야 한다.
나라 살림을 꾸리는 사람을 농부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의 뿌리가 튼실하고 싹이 잘 자라도록 토양을 다지고, 적절한 양의 햇빛과 물을 조절하면서 모자란 부분의 북을 돋워주는 역할이 중요하다. 예부터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다. 보리 뿌리도 그 소리를 듣고 자라며 한 올씩 여물어갈 이삭을 제 몸에 품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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