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이 고향인 전미향 씨(52)는 자신이 50대에 창업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그의 운명이 달라졌다. 100년 이상 대대로 이어오던 의성전통시장의 방앗간과 솜틀집을 시아버지께서 그만하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다.
그는 이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약 10개월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방앗간과 솜틀집은 지난달 30일 카페와 로컬푸드를 판매하는 복합공간 ‘향촌당’으로 변신했다. 전씨는 이 공간에서 의성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과 손님들을 맞고 지역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로 참기름과 들기름, 미숫가루 등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은 그에게 의성전통시장의 ‘1호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명칭을 안겨줬다.
전씨는 경북 안동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평생 주부로 생활하다가 4년 전 근로복지공단 안동지사에 처음 취직했다. 계약직이었지만 2년 전 무기계약직으로 바뀌면서 60세 정년과 월 250만원의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았다. 그런데도 사표를 냈다. 그는 “남편의 어릴 적 추억이 서려 있고 시아버지께서 평생을 바친 소중한 공간을 잃고 싶지 않다”며 “시아버님을 졸랐다”고 했다.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마지막 손님을 받은 지난해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 시대 지어진 목조 건축물의 보와 도리, 서까래 등 원형은 살리고 빛바랜 천장 판자목만 덧댔다. 예쁜 벽돌로 벽을 쌓아 올리고 시장골목을 향해 큰 창도 냈다. 카페 한가운데 놓인 130년 된 솜틀기와 방앗간 기계, 천장에 매단 동력전달장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카페로 바꿔놨다.
방앗간 자리에는 의성의 소농들이 생산한 깨로 기름을 짜고 미숫가루를 만들 착유기와 식힘기, 볶음솥을 들였다. 카페에서는 커피 외에 곡물라테 등 메뉴를 추가했다. 건물 리모델링과 기계구입에 든 돈만 1억4000만원. 사는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냈다. 적지 않은 투자였다. 시아버지는 “뭣하러 그런 일을 하느냐”며 걱정했지만 전씨는 “리모델링을 끝내고 가게를 연 지난달 30일 자신이 지켜낸 건물과 기계를 보면서 더없이 흐뭇했다”며 눈물을 감췄다. 전씨는 “건축을 전혀 모르는 여자 혼자 힘으로 건물을 새로 단장하고 기계를 들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뭔가 의미있는 일에 도전했다는 설렘에 지난 몇 달간을 힘든 줄도 모르고 지냈다”고 말했다.
전씨는 사업가의 길에 접어든 만큼 준비도 단단히 했다. 지난해 경북사회적경제 창업학교에서 기업 운영에 필요한 수업을 듣고 세세한 노하우도 배웠다. 전씨는 “주부가 고향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하니 창업학교에서도 특별한 애정을 갖고 도와줬다”고 고마워했다. 인스타그램과 네이버스토어 입점 준비도 마쳤다. 로컬푸드 매장의 주력 제품이 될 기름병과 미숫가루 포장 디자인은 대구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 잘 팔릴지 걱정도 많았지만 지난해 12월 시행한 크라우드 펀딩 때는 목표액의 다섯 배를 달성하고 꽤 자신감을 얻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영업 준비를 하는 기간 손님 중에는 청년 관광객도 있었지만 고향 어르신들이 더 많았다. 전씨는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솜틀기와 방앗간 기계를 지켜줘서 오히려 우리가 고맙다고들 하셨다”고 전했다. 지난 세월 방앗간과 솜틀집은 고향의 농민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는 공간이었다. 명절에는 떡을 뽑고 기름을 짜고 강정을 만들기 위해 긴 줄을 선 설렘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 공간이 감성적인 공간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반드시 들러야 할(must visit) 곳으로 바뀐 것이다. 전씨는 “5일장이라 2일과 7일이 든 날에만 장이 서지만 향촌당 바로 옆 닭발골목에는 평일에도 전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세대들의 변화된 소비문화에도 주목했다. 전씨는 “요즘 밀레니얼 세대는 무조건 가성비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정신이 깃든 새로운 소비문화를 찾는다”며 “우리농산물, 환경, 건강 등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농촌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라지게 둘 수 없었죠"
당시에는 솜틀기를 하루 종일 돌려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일감이 많았다. 양씨는 “10여 년 전에는 사별한 아내와 함께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일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양씨는 “딸을 시집보낼 때 목화 솜이불은 빠져서는 안 될 혼수였다”며 “130년이나 된 기계지만 평생을 함께했는데도 세월을 용케 버텨낸 분신 같은 기계였다”며 애정을 나타냈다. 솜틀기는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목화씨와 솜을 분리하는 조면기와 분리한 솜으로 이불솜을 제작하거나 오래된 이불솜을 새것처럼 만드는 타면기로 구성돼 있다.
양씨는 “1960년대에는 솜이불 한 채를 틀어주면 4000원 정도 받은 것 같다”며 “손님들은 형편에 따라 외상을 하거나 고생한다고 삯을 더 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양씨는 “바쁠 땐 일꾼도 세 명이나 둘 정도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솜을 틀러 오는 손님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접어야 했는데 며느리가 이런 공간을 마련해줘서 참 고맙다”며 흐뭇해했다.
의성=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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