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차 직장인 조모씨는 지난달 퇴직연금을 맡긴 은행에서 문자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포괄운용지시에 따라 연 0.97% 정기예금에 36만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몇 년째 비슷한 메시지가 계속 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알아서 굴려주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친구들과 얘기하다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의 퇴직연금 수익률과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1% 미만의 이자를 주는 상품에 투자한다는 메시지를 못 본 체한 게 잘못이었다.
10명 중 3명 운용방식도 모른다
전체 퇴직연금 255조원 가운데 1%대 수익률에 머무르는 원리금보장형은 228조원에 달한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퇴직연금이 전체의 90%나 되는 셈이다. 특히 주가가 급등한 작년을 보면 이런 퇴직연금 운용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 수 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2.58%다. 실적배당형은 10.67%였지만, 원리금보장형은 1.68%에 그쳤다. 전체로 해도 국민연금공단이 발표한 지난해 국민연금 잠정 수익률(6.56%)보다 4%포인트나 낮다. 국민연금과 함께 직장인의 노후를 책임지는 퇴직연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작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255조원까지 불었다. 국민연금 적립금(작년 말 기준 781조원)의 3분의 1(32.65%)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저조한 수익을 내는 근본적 원인으로 ‘무관심’을 꼽고 있다. 주식 등 손실이 날 수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실적배당형 상품은 지난해 수익률이 전년보다 4%포인트 뛰었다. 적극적으로 연금을 관리했다면 10.67%의 수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에 자금을 묶어두고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 규모는 전체 퇴직연금의 10.70%에 불과하다. 주식 시장에서 직접 투자 열풍이 불었지만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2019년(10.39%)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2018년 시행한 ‘퇴직연금 가입자 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입자 10명 중 3명은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떤 형태로 운용되는지조차 모른다고 답했다.
발 빠른 연금 개미 작년에만 1兆 옮겨
변화의 움직임도 있긴 하다. 발 빠른 투자자들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금계좌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은행과 보험에 가입한 연금계좌를 증권사로 옮겼다. 은행 계좌를 통해서도 실적배당형 상품에 가입할 수 있지만, 상장지수펀드(ETF) 등 더 다양한 투자 상품을 이용하려면 증권사 계좌가 필요하다.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4대 증권사(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작년 한 해 은행과 보험사에 있던 연금계좌 중 총 1조1358억원 규모가 증권사로 넘어왔다. 전년(4507억원) 대비 152%나 폭증했다. 올해도 이동 속도가 빠르다. 지난달에만 2876억원이 증권사로 이관됐다. 한 증권사 연금마케팅 담당자는 “지난해 주식 투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목돈인 퇴직연금을 ETF 투자 등에 활용하려는 투자자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원금손실? TDF 시장 500% 폭증
물론 원금 손실 가능성은 있다. 실제 2016년(-0.13%)과 2018년(-3.82%) 당시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은 마이너스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타깃데이트펀드(TDF)를 찾는 투자자가 늘기 시작했다. TDF는 자산운용사가 가입자의 은퇴연도에 맞춰 자산 비중과 전략을 조정해주는 상품이다. 2045년 은퇴 예정자가 ‘2045년형 TDF’에 가입하면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높게 가져가다가 은퇴연도가 가까워질수록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 등 안전자산 비중을 높이는 식이다. 지난 5일 기준 국내 TDF의 설정액 규모는 총 4조5361억원으로, 2017년 말(6620억원)과 비교해 설정액이 585% 늘었을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전문가들은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폴트옵션(사전지정 운용제)이 도입되면 TDF 시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홍원구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금 운용의 핵심은 손실을 내지 않으면서 수익을 올리는 것”이라며 “위험자산에 투자하더라도 자산배분을 통해 다양하게 분산 투자할 수 있도록 디폴트옵션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전범진/박재원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