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괘씸죄?…아스트라제네카 둘러싼 '新백신 민족주의' [글로벌+]

입력 2021-02-14 09:00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백신 효과를 둘러싸고 국가 간 미묘한 입장 차가 감지되고 있다. 일부 나라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승인을 보류하거나 제한적으로 허용한 가운데 영국은 백신 품질에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이 고령자에 대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권고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게 눈에 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같은 정책적 요인이 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점점 퍼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불신 분위기
AP통신은 지난 7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이 이달 중순부터 접종을 개시할 예정이던 아스트라제네카·옥스퍼드대 공동개발 백신의 사용을 보류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남아공 보건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현지에서 발생한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효능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해 백신 접종을 보류한다고 밝혔다.

남아공은 인도 제약사 세룸인스티튜트가 위탁 생산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00만회분을 이달 초 건네받았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는 과학자들의 확실한 검증이 있기 전까지 백신 사용을 보류하기로 했다. 대신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백신 보급에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남아공 당국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효능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백신이 코로나 감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없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앞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이달 3일 유럽 내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연령에 상관없이 사용 승인이 전면 보류됐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사용을 승인하면서도 고령자에 대해선 접종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여전히 방역에 중요한 요소"
지난해 말 세계 최초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승인한 영국 당국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은 백신 접종자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한 65살 이상 고령층에서 코로나 예방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영국 당국은 지난달 24일까지 백신을 접종한 700만명을 대상으로 안전성 관련 분석을 진행했다. 이 중 대부분은 화이자 백신을 맞았고 일부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다.

영국의 백신 승인 과정에 관여한 인체용 약품 전문가 워킹그룹 위원회 위원장인 뮈니르 피르모하메드 경은 "영국 당국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승인할 당시 65살 이상에 관한 충분한 자료가 없었지만 이들에게 백신이 효과가 없다는 증거 역시 없다"며 "효과가 위험성(리스크)을 압도한다"고 주장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지난달 28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모든' 연령에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등 자국산 백신의 안전성을 지지했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승인을 거부하는 등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승인 거부 사례가 나오자 진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백신을 공동개발한 옥스퍼드대는 지난 6일 해당 백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비롯된 코로나 변이에 대한 예방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임상시험 결과를 내놨다. 옥스퍼드대와 남아공 비트바테르스란트대 연구진은 2026명 대상으로 시험한 결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두 차례 접종하는 방식으로는 남아공 변이로 인한 코로나 경증과 중등증 증세를 막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험에 참가한 2026명 중 남아공 변이에 걸린 사람이 39명에 그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남아공 변이에 대한 효능이 있는지를 판단하기에 표본이 지나치게 적다고 보도했다. 또 시험 참가자 2026명의 평균 연령이 31세에 불과해 모든 연령대에 효능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합리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옥스퍼드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분명한 효과가 있다고 강조다. 새라 길버트 옥스퍼드대 수석 연구원은 "기존 백신이 경증 환자, 무증상 환자의 증가는 막을 수 없더라도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를 줄이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의료 시스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잉글랜드 최고 의료 부책임자인 조너선 반-탐 교수 역시 지난 8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남아공 변이에 효과가 떨어진다는 연구가 나왔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언급했다.
"백신 확보, 국가 지도자의 정치력과 연관"
이처럼 국가 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백신 승인 여부에 변수로 떠올랐단 분석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신(新)백신 민족주의' 경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 민족주의는 자국의 백신 물량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국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하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백신을 만든 국가의 국제관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백신 승인 유무를 판단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는 분위기"라고 짚었다.

이어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지 않았다면 독일에서 (아스트라제네카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대대적 보도가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봤다. 일종의 '브렉시트 괘씸죄'라는 얘기다. 그는 서양 국가들이 중국산 백신 시노백과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V를 사용하지 않거나, 반대로 이들 국가가 서구권 국가가 만든 백신을 사용하지 않는 상황도 '신백신 민족주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다만 코로나 확산이 지속될 경우 다시 생산국에 상관없이 물량 확보 경쟁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백신 확보가 지도자의 정치력과 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스트라제네카와 비교적 관계가 좋은 우리 정부는 당초 EU와 결을 같이 하며 관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가 지난 10일 국내 최초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허가했다.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사용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지난 8일 KBS 뉴스에 출연해 "지금의 위험 상황이나 백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감안할 때 접종하는 게 더 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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