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감계)회담에서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청나라 관리에게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가 한 말이다.
우리에게 ‘간도’는 무게감이 큰 존재다. 영토, 역사, 일본과 중국이란 외세,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의무인 ‘간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사실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1712년에 정계비를 설치한 과정과 내용,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 방식은 결국 19세기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간도’ 사태로 이어졌다(이상태, 『독도수호와 백두산 정계비설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두 강을 넘어가 개간을 시작했고, 이때 사이(間)섬을 뜻하는 ‘간도’라는 말이 역사에 등장했다. 한편 간도에는 개간(墾)한 곳이라는 의미와 조선의 ‘간(艮)방’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주민이 계속 넘어오면서 거주 범위가 확장됐고,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만주 전체가 조선인의 터전으로 변해 ‘동간도(두만강 이북)’, ‘북간도_노야령 이북)’, ‘서간도(압록강 이북)’로 불렸다.
그러면 ‘간도 사태’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을까?
기근과 재해, 관리들의 탐학을 못 견딘 백성들은 1862년에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민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함경도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13가구, 60명이 주민은 결국 두만강을 건너 몇년 전에 러시아가 청나라에 빼앗은 연해주 남쪽에 정착했다. 이어 1869년에 북부 일대에 막대한 수해로 ‘기사 대흉년’이 발생하자 수천명의 조선인은 고향을 떠나 간도 지역에 정착했다.
청나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등 여러 이유로 1875년 무렵 남만주 일대에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던 봉금령을 200여 년 만에 해제했다. 1844년의 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서양의 반식민지 상태로 변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헤이룽강 이북의 땅 100만 ㎢를 빼앗겼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서진을 계속하자 청나라는 만주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자국인들의 만주 이주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이미 조선인들이 개간해 정착한 상태였다. 심지어 1869년에는 강계군수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인이 정착한 서간도 일대를 강계군의 여러 면에 배속시키고, 세금을 받는 등 관리를 시작했다. 이렇게 변한 상황에서 국경선과 조선 주민의 관리권을 놓고 두 나라는 이미 충돌을 시작했다(백산학회, 『간도영유권 문제 논고』).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이 발생했고, 다음해에 조선과 일본과 ‘병자수호조규’를 맺었다. 제1 조항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인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고, 간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첫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1881년 한족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간도 일대를 개척시켰고, 1882년 4월에는 조선인들의 월강을 막으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5월에 이훙장이 주선해 조선은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와 척족세력들의 요구를 빌미로 청나라는 군대를 파병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속방체제로 구축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간도의 조선인을 1년 이내에 송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실수였다. 다음해 청나라가 간도의 조선인을 소환하라고 다시 요구하자 조선은 개혁파이자 국제 경험을 갖춘 어윤중을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이 무렵 간도 지역의 조선인은 청나라의 부당한 정책과 피해 상황들을 돈화현에 항의하고, 정계비와 국경 문제의 핵심인 강의 근원 등을 자체적으로 조사한 후 결과물을 종성부에 제출했다. 때마침 이를 본 어윤중은 관리들을 두 번 파견해 정계비를 조사하고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비의 탁본도 만들었다, 이후 토문강을 답사한 후에 조정에 보고했다. 결국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사해서 확인한 것이고, 정부는 그 덕에 비로소 인지한 것이다.
고종은 1883년 5월 어윤중에게 정계비를 조사하라고 파견했다. 그는 7월에 돈화현에 공문을 발송하고 조사자료 등을 청나라에 발송한 후 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 등을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후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4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
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에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했고,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제 5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 이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 발표한 글에서 이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
1887년 4월에는 제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들을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같은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들을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 또 간도와 연관해서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河)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지금 봉황성 남동쪽 아래에 망우초 카룬를 설치한다며 조선에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조선인들의 인삼채취와 밀무역을 단속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강력한 반발로 두 번 다 무산됐다. (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이런 사실을 보면 두 강은 청나라가 설정한 봉금지대의 남쪽이며 조선이 현실적으로 양해한 일종의 무인지대일 가능성이 크다.
양 국의 주장이 계속 충돌하자 청나라 관리는 이중하에게 칼로 위협하려 했고,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릴수 있어도, 나라영토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며 강격책을 고수했다. 결국 2차 감계회담은 결렬됐지만 국제정세는 조선에 유리하게 변해갔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1항에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란 조항을 수용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했고, 조선은 1897년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면서 자주성을 표방했다.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간도 주민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국경조사를 재차 시행했다. 관리들을 파견해 조선인들의 호구와 경작면적 등을 조사하면서 보호와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1900년에 들어오면서 서간도는 평안도로, 동간도는 함경도로 편입시키고 세금을 징수해 군사들의 훈련 등 운영비로 충당했다. 1902년 5월에 북간도 시찰사로 파견된 이범윤은 인구와 호구조사 등을 실시했고, 포수 등을 모집해 사포대를 조직하며 무장력을 갖췄다. 반발한 청나라가 조선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에 굴복한 조정은 그에게 철수를 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복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명한 후 훈춘 부근에 주둔했다. 이후 연해주로 넘어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4년에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 후에도 요동 진출에 실패했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차지했고, 러시아에서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무순 등의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이었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간도’를 만주 진출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지금껏 진행 중이다.
한 시대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포기하면 결국 후손들에게 멍에를 씌운 부끄러운 조상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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