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린트는 지난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보도했다.
래리 플린트는 미국 사회에서 ‘외설이냐, 표현의 자유냐’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플린트는 노골적인 내용의 성인물을 발행해 외설죄로 여러 차례 법정에 섰다.
하지만 그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수호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며 법정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래리 플린트’(1996)로 개봉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켄터키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플린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GM 공장에서 일하다가 1968년 동생과 함께 오하이오주에서 ‘허슬러클럽’을 열면서 성인물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성인 클럽을 홍보하기 위해 소식지를 발간했고, 이후 이 소식지를 성인 잡지 ‘허슬러’로 탈바꿈시켰다. 플린트는 발행 부수 300만 부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던 허슬러를 발판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성인물 왕국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의 공격적인 성인물 사업은 보수 진영과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의 큰 반발을 초래했다. 1975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진을 몰래 찍어 허슬러에 실었고, 표지 사진에 대중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충격적인 외설 사진을 게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1988년 ‘허슬러 대 폴웰’ 소송사건에서 승소하면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플린트는 이 재판에서 수정헌법 제1조를 무기로 허슬러 게재 내용은 공인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이자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결국 그의 손을 들어줬다.
플린트는 자신을 ‘걱정이 많은 외설물 행상’이라고 불렀다. 1996년 발간한 자서전 제목은 《꼴사나운 남자: 외설물 제작자, 전문가, 추방자로서의 나의 삶》이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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