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나 추석 때 ‘민심’이라며 바닥 여론을 돌아보는 것은 한국적 관행이다. 정치·행정 쪽이 그렇고, 신문·방송도 그렇다. 이런 연휴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잠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가족 친지들, 친구들과 대화에서 우리 모두가 확인하는 바다. 어쩔 수 없이 비대면 이었지만, 이번 설도 그랬다. 전화로 안부를 넘어 단톡방도 넘어 구식, 구글 미트 등을 이용한 온라인 정담도 생활로 자리 잡아 가는 것 또한 눈에 띌만했다.
다른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 걱정들이다. ‘먹고살 고민’과 ‘노후 걱정’이다. 포퓰리즘 경쟁, 곳곳의 오도된 정책, 저급한 퇴행 정치도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귀착점은 돈 문제이고 생활문제다. 선동정치나 포퓰리즘 경쟁으로 얘기하자면 집값문제, 공매도와 주식시장 얘기도 빠질 수 없다. 그러다가 푸념과 한숨 끝에는 “그래서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되나, 노후는 (경제적으로) 안전한가”로 이어진다.
개인들도 국가 사회도 대처 준비할 시간이 없고 여력도 없다. 빛과 그늘이 함께 있는 것이다.
고령화 자체보다 동시에 진행되는 저출산이 걱정거리다. ‘인구가 줄어들면 국가가 소멸 한다’는 식의 단순한 공포 조장형 문제제기가 아니라, 경제활동인구의 감소가 불러올 파장 문제다. 여기서도 급격한 감소가 핵심이다. 상승이든 하락이든 증가든 감소든 서서히 진행되면, 그래서 시간을 갖게 되면 별로 문제될 게 없다. 대처할 시간이 문제다. 저출산으로 줄어든 젊은이들이 급증하는 노인세상을 떠받칠 수 있을까, 이제 모두가 생각하게 됐다.
설 연휴,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이라는 계기를 맞게 되다보니 퇴직·은퇴해서는 어디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게 된다. 가족 친지 친구들과 대화 소재가 되기 마련이고 서로 의견도 나눈다. 해법 없는 저출산도, 고령화도 사회 문제고 국가 걱정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이 내 고민은 나의 노후 걱정이다.
이 대목에서 국민연금 얘기가 나온다. 저축도 자산도 뻔하고, 기댈 곳이 없다. 자식은 ‘자산’이 아니라 일종의 ‘부채’가 된지 오래다. 개별 금융회사를 통해 개인연금이라도 미리미리 가입해 놓았다면 걱정은 덜 할 것이다. 공무원처럼 법적으로 보장받는 공무원연금이라도 있으면 조금 낫겠지만 상대적으로 소수다. 공무원 연금은 기여금도 더 많았고, 법적으로 국민연금과는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같이 ‘연금’이라는 말을 쓰는 데다 ‘국민’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다. “따지지 말고!”라고 외치며 같은 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이들이 많은 것도 걱정이다.
부족하다해도 현실적으로 국민들 노후가 달린 국민연금을 지급불능 사태로 내버려 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령 약속된 대로 간다 해도, 연금 수령액이 적다는 투정과 불만이 늘어나면 이 또한 사회적 압력이 될 수 있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이고, 자기 앞만 보면서, 내 몫 늘려달라는 지금의 한국 사회 분위기로 보면 뻔한 길이다.
국민연금에 혈세지원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지원조건이 아니라, 지원의 공론화 시작 조건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크게 봐서 3가지다. 첫째, 전 국민적 공감대다. 국민연금에 미가입자들도 동의해야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가입자 숫자는 부차적 문제다. 다수의 힘으로 국가재정을 털어먹을 수는 없지 않나. 둘째, 초기 가입자, 지금 수령자만 덕 보는 제도 설계 오류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초기 제도 도입자들에 대한 문책과 정부의 사과 없이는 어떤 논의도 공허하다. 셋째 국민연금에 대한 개혁이다. 방향은 전문성 독립성 보장으로 효율을 높이면서 정치적 중립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 3가지 조건에 대한 상론(詳論)은 다음 ‘여기는 논설실’로 미룬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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