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너무나도 다른 韓·日 가업승계

입력 2021-02-15 17:54   수정 2021-02-16 00:11

일본의 중소형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기술승계기구는 투자금 회수(엑시트)를 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PEF는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해 기업가치를 높인 뒤 되팔아 수익을 내는 투자회사다. 그런 PEF가 투자금 회수를 마다하는 것은 자본시장의 상식을 뒤엎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별종 PEF인 기술승계기구가 살아남는 비법은 배당이다. 인수한 기업을 재매각하지 않고 오랫동안 회사를 운영하며 얻은 이익을 돌려줘 펀드 출자자를 끌어모으는 것이다.

기술승계기구가 잘나가는 배경은 따로 있다. 일본에는 후계자가 없어도 PEF에는 회사를 팔지 않겠다는 중소기업 경영자가 의외로 많다. PEF에 매각된 회사는 투자금 회수를 목적으로 몇 년 뒤 또다시 팔리게 된다. 자식처럼 키운 회사가 몇 년 간격으로 두 차례나 생면부지인 인수자에게 팔려나가는 게 중소기업 경영자로선 맘이 편치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기업 되팔지 않는 PEF 증가
기술승계기구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중소기업 경영자다. 기술승계기구는 지난 10일 후쿠시마현의 납땜장치 제조업체 FA신카테크롤로지 지분 100%를 사들이면서 펀드 설립 3년 만에 세 번째 인수합병(M&A)을 성사시켰다.

최근 들어 일본엔 기술승계기구처럼 ‘엑시트를 하지 않는 PEF’가 늘고 있다. 요시무라푸드홀딩스는 식품회사 20여 곳을 인수했다. 미치노리홀딩스는 지방 버스회사 등 교통 관련 중소기업에 전문적으로 투자한다.

정책금융회사인 일본정책투자은행이 작년 말 설립한 사업승계펀드도 후계난을 겪는 중소기업의 승계를 지원하는 수단이다. 이 펀드는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하는 등 경영에 뜻이 있는 젊은 인재에게 중소기업 M&A 자금을 댄다.

중기 경영자는 자신의 기업을 경영해보겠다며 손을 내미는 후계자의 면면을 보고 회사를 넘길 수 있다. 사업승계펀드 또한 고령의 중기 경영자들이 후계난 속에 외부 전문경영인을 들이는 데 저항감이 강한 점을 고려해 설계됐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20여 년 전부터 가업승계난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승계제도가 충실하게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소기업의 가업승계를 장려하기 위해 상속세와 증여세를 전액 유예하거나 면제하는 ‘특례사업승계제도’의 신청 건수는 2018년 제도를 도입한 지 2년 만에 10배로 급증했다.
한국도 가업 상속 늘지만
그런데도 새로운 사업승계 수단이 속속 등장하는 것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중소기업의 후계난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미뤄둔 숙제였던 사업승계를 심각하게 검토하는 경영자가 늘어난 반면 기업을 물려받을 인재는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M&A 자문사 레코프에 따르면 지난해 사업승계 목적의 매각은 약 600건으로 10년 전에 비해 네 배 늘었다. 작년 상반기 후계난을 이유로 도산한 기업은 194곳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80% 증가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를 계기로 “더는 못 버티겠다”는 중소기업 경영자의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과 비슷한 사업승계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규제에 발목이 잡혀 성과는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피땀 흘려 키운 회사를 남의 손에 맡기기 꺼리는 중기 경영자의 심리까지 고려한 일본 사업승계제도를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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