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한한령 5년의 '차이나 패러독스'

입력 2021-02-17 17:28   수정 2021-02-18 00:18

‘총 한 정 없는 군대(Army)가 핵 보유 강대국을 물리쳤다.’ 작년 10월 방탄소년단(BTS)의 ‘밴 플리트 상’ 수상 소감을 중국이 트집 잡다 한방 먹은 사건의 한 줄 요약이다. 중국 네티즌과 관영매체들은 BTS 리더 RM이 6·25전쟁 70년을 맞아 한국과 미국이 함께 겪은 고난을 언급한 게 중국을 모욕한 것이라며 발끈했다. 당시 중국은 6·25를 미국에 승리한 항미원조(抗美媛朝) 전쟁이라며 연일 ‘국뽕’ 다큐멘터리를 틀어대던 터였다.

하지만 논란은 며칠 못 갔다. BTS 팬덤인 ‘아미’가 중국을 나치에 빗댄 ‘차이나치(#chinazi)’ 해시태그를 걸어 SNS에 퍼뜨리며 조롱하고 나섰다. 중국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이에 놀란 중국 정부가 황급히 수습하면서 무마됐다. 세계 아미들이 ‘G2’ 대국을 톡톡히 망신 준 셈이다.

이 사건은 단순 해프닝으로 볼 일이 아니다. ‘글로벌 권력 이동’의 상징적 장면이기 때문이다. 아미의 주력인 MZ세대(10~30대)는 윗세대와 달리 ‘세대 간 연대감’이 유독 강하다. 이들에겐 인종 국적 종교 성별 나이 등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산업혁명 이래 부모보다 못 살게 된 첫 세대이자, 밥은 굶어도 ‘연결 단절’은 못 참는 디지털 원주민의 정체성을 지녔다.

BTS가 ‘시대의 아이콘’이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멤버 7명이 노래로 털어놓은 고민과 좌절, 땀과 눈물에 MZ세대가 깊이 공감했다. 무려 100억 회를 넘긴 유튜브 뮤직비디오 총 조회수가 말해준다.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는 일관된 메시지에 위로받고 의욕을 찾았다는 지구촌 젊은이가 부지기수다. 그런 ‘선한 영향력’은 K팝을 공장에서 찍어낸 ‘팩토리 아이돌’로 낮춰 보던 서구 언론의 시각마저 바꿔놨다.

이 사태 후 “BTS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중국의 실수다”(워싱턴포스트) “중국이 K팝 거인에게 싸움을 잘못 걸었다”(포린폴리시) 등의 평가가 나왔다. 그동안 덩치만 큰 ‘중2병’ 환자 같은 중국의 완력 과시에 미국을 뺀 수많은 나라가 움츠러든 게 사실이다. 편협한 중화 민족주의가 국제 혐중(嫌中) 여론을 부채질했고,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중국이 자초한 ‘차이나 패러독스’다. 중국이 국제무대 전면에 나설수록 14억 인민은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역설이다. 여기에 더해 벌써 5년째인 한한령(限韓令)이 집요할수록 중국의 초라한 ‘소프트 경쟁력’만 드러내고 있다. 물론 한한령 탓에 한국 엔터테인먼트와 여행·관광·유통업계, 롯데 등 중국 진출 기업들이 타격을 입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 시장이 막히자 K컬처는 세계로 나가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K팝·영화·드라마·방송 포맷이 핫 트렌드로 떠올랐다.

이는 1999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등 지난 20년간 일련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반면 툭하면 틀어막고 억압하고 베끼는 중국은 축구만큼이나 별로 내세울 게 없는 나라가 돼간다. 요즘 중국에서 김치, 한복, 김연아, 이영애 등까지 동북공정 대상으로 삼아 우기는 그 ‘정신승리’를 보면 어이없다 못해 안쓰러운 지경이다.

어느덧 세계가 ‘봉준호 보유국’ ‘BTS 보유국’을 부러워하고 있다. 선진국은 경제력과 함께 문화강국이란 필요조건도 충족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민주화·산업화를 이룬 ‘주목할 나라’, 문화적으로도 ‘부러운 나라’를 넘어 ‘존경받는 나라’로 도약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어서다. 기업과 문화는 세계일류 반열에 성큼 다가섰는데 국가의 방향타(舵)인 입법·사법·행정은 여전히 3류 수준을 맴돌고 있지 않은가.

K컬처 덕에 세계인이 한국의 언어 문화 음식 등 모든 걸 궁금해하고, 가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인류 보편가치를 외면하는 나라란 인상마저 풍긴다. 북한·홍콩·신장위구르 등의 인권에 눈감고, 대북전단금지법으로 국제적 공분을 사며, 58개국이 서명한 외국인 구금 규탄 선언에 북한 중국 눈치 보느라 빠진 것도 한국의 민낯이다. 그 어떤 독재와 통제, 압력과 차별도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 보편가치를 이길 순 없다. 문화강국이 되려면 국제사회와 보편가치도 공유해야 한다. 지금은 절호의 기회이자 심각한 위기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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