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재편 속 맺은 간도협약, 접근법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1-02-21 09:20   수정 2021-02-21 20:39


‘간도 영유권 갈등’ 은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부터 1885년, 1887년의 감계회담과 간도협약을 거쳐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 간 매우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간도 협약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면 조약의 정당성과 실효성 여부의 검증과 함께 내용과 배경을 국제질서의 재편이란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과 구질서의 청산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어 사할린 지역과 조선의 지배권, 만주의 선점을 걸고 러시아와 충돌했다. 독도를 차지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이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던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대한제국과는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7년에는 프랑스와 ‘불·일협약’을 맺고, 러시아와는 ‘제1차 러·일협약’을 맺어 러시아가 구축한 철도·항만·탄광 등 만주의 이익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그런데 1906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 통감부에 간도 지역에 사는 조선인을 마적 등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자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고 육군중좌를 소장으로 파견해 원대한 목표와 행정구역의 설정 등 치밀한 계획을 갖고 간도협약을 주도했다.

연길청까지 설치한 청나라는 대군을 파견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두 나라는 1909년 1월부터 협상을 시작해 9월 4일에 ‘간도협약(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맺었다. 전문 7조로 구성된 협약의 제1조는 간도문제다. “일·청 양국 정부는 도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류땅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함을 성명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이렇게 간도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기고, 협상카드로 요구한 안봉선(단둥~심양 간 철도), 길회선(연길~회령 간 철도) 등의 만주철도 부설권, 무순·연대의 탄광 채굴권 등 5건을 획득했다(노계현, 『백두산 및 간도 지역의 영유권 문제』).

그런데 체결 직후인 10월 26일 러시아와 밀약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그리고 11월 1일에는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협약을 맺으면서 간도 내에 용정 등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곳의 개방, 영사관 및 분관 설치, 영사재판권 등을 보장받았다. 따라서 간도 지역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일본 정부가 병력을 갖고 다수의 한국 사람들과 진출을 시작한 일본인의 관리권을 가진 지역으로 변신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만주를 점령하고 통치하려는 선결작업이었고, 준비 기간을 확보하려는 단계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훗날 만주국을 세우면서 길림성 지역을 ‘간도성’으로 변경한 것은 간도협약에 숨긴 일본의 전략을 밝혀준다.

그런데 청나라는 왜 일본의 책략을 간파하면서도 무리한 요구를 수용했을까? 멸망 3년 전인 시점인 데다가 ‘반청혁명’ 등 내부 혼란으로 일본에 대항할 능력은 부족했다. 한편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러시아의 남진과 서진을 제어할 세력으로 일본을 이용한다는 전략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또하나는 국가를 넘은 민족 또는 역사영토와 연관된 장기정책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한국(조선)은 수천년 동안 영토갈등을 일으킨 숙명적인 상대였다. 특히 간도는 정계비를 세운 후 국경 문제를 일으켰고, 청나라의 발상지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 특유의 장기전략과 불확실한 국제질서를 고려해 간도에 대한 영구권리를 확정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 많은 이익을 양보했지만, 결과를 보면 올바른 선택이었고, 영악한 후손들은 이 전략을 성공시켰다.

실제 대한제국에 이어 청나라까지 멸망하자 한국인들은 두 강을 건너왔고, 주인 없는 만주를 개발했다. 그리고 간도를 독립전쟁의 기지와 생활영토로 만들면서 범위를 확장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공산당의 일원으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이 항복하자 간도는 승전국의 일원인 중국의 영토로 굳어졌다. 많은 한민족은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100만명 이상 남은 그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편 만주의 지정학적·지경학적 가치를 잘 알고, 국경분쟁을 자주 벌인 러시아도 만주 지역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러시아는 1948년 2월에 간도 일대에 조선인 자치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평양협정을 북한과 체결했다. 연길 등 간도 지역 일부를 북한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다는 문건이 공개됐다.

중국 정부가 만주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팔로군에 소속된 조선족 다수가 북한군으로 편입돼 남침에 참여했다. 이에 남북통일을 저지하고 만주를 지킬 목적으로 중공군이 대거 파병될 때도 동원돼 큰 희생을 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만주에서 조선족의 힘은 약화했고, 1955년에는 ‘조선족 자치구’에서 ‘자치주’`로 격하됐다. 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은 국경선을 재조정한 ‘조·중 비밀변계조약’을 맺었다. 뒤늦게 밝혀진 내용을 보면 간도문제와 연관된 조항들이 있다. 백두산의 천지를 분할하고, 동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했는데, 두만강은 상류인 홍토수를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이는 이중하가 주장한 조건과 동일하다. 또 천지의 소유권은 북한이 54.5%로서 중국보다 넓고, 두 강 안의 섬들도 북한이 더 많이 소유했다. 이 때문에 협상 책임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비판받았고, 대만도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입장에서도 ‘토문’을 두만강으로 인정했으므로 간도지역의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는 100년의 시한(2009년)을 넘긴 정부를 매우 비판한다. 그런데 을사늑약 자체가 정당한 국제법에 벗어나고, 간도협약도 조약의 당사국인 대한제국이 배제됐으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못 미친다는 주장이 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모든 영토 갈등은 이어도를 제외하고는 100년이 넘은 사건들이다. 따라서 어떤 나라가 100년 시효설을 주장할 경우, 역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불리하게 작동될 수밖에 없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간도 협약은 한국의 민간(‘간도되찾기운동본부’)과 중국 정부에 중대한 문제로 남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그 때문에 중국은 2002년에 1단계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중점과제들을 선정했는데, 간도문제 등 국경과 영토 문제의 비중이 매우 컸다(박선영, 「간도 문제와 조선족 문제」). 지금도 간도가 중국의 영토임을 정당화시키는 다양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간도문제를 명분과 영토 문제를 넘은 동북진흥계획의 일환인 창치투(長春 吉林 圖們) 계획 및 동해진출 전략과 연관시켜 활용하고 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은 수교하면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상호영토를 존중하고 보존하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정치력과 군사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과거 한국 역사 문제 관련 발언, 신중화제국주의로 변질하는 ‘중국몽’을 보면 간도문제의 제기는 조선시대보다 더 현실성이 없을 것 같다. 시 주석은 2017년 8월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6·25전쟁에 대해 ‘정의로운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언급했다. 같은해 열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한국은 과거 한때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터뷰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도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첫째, 학문적으로 토문의 위치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규명하고, 간도협약의 부당성과 국제법상의 문제점을 일본을 비롯한 세계에 알려야 한다. 둘째, 조중변계조약의 내용과 북한이 제안하고 수용한 배경을 파악하고, 통일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셋째, 국가운명과 연관지어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장기계획에 맞춰 단계별 전략을 세우고 검증하면서 당당한 태도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역사는 항상 변하는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과 한국, 한국과 일본이 하나의 정치체가 될 수도 있고, 상호 간 또는 세 나라 간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 나라와 민족에게는 빼앗겨서는 안 될 터전과 지켜야 할 역사가 있다. 늘 우리의 생활영토였던 간도가 그렇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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