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어제 대기업 9곳의 최고경영자(CEO)를 증인으로 부른 산업재해 청문회는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산재사고를 줄일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을 위해 준비했다는 청문회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호통과 망신주기로 일관했다. ‘갑질 국회’의 고질적 병폐가 어김없이 되풀이된 것이다.
윽박지르기성 질의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답변 준비로 잠시 머뭇거리는 CEO에게 “왜 답변을 못 하시나. 회사 내에서도 이렇게 소극적으로 말씀하시냐”(임이자 국민의힘 의원)는 등 본질과 무관한 면박주기에 기업인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청문회 내내 알맹이 없는 질문에 기업별로 이미 발표한 대책을 반복하는 수준의 ‘수박 겉핥기’에 머물렀다. 이럴 거면 바쁜 CEO들을 불러 청문회까지 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국회가 국정감사,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도 아니고 임시국회 회기 중 상임위 차원에서 CEO들을 대거 소환한 것부터 극히 이례적이다. 여당뿐 아니라 틈만 나면 ‘기업인 기(氣)를 살려야 한다’고 외쳐온 국민의힘이 앞장선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산재를 관장하는 안전담당 임원을 불러도 될 일을 굳이 CEO를 호출해 호통치기에 나선 것은 4월 재·보궐 선거를 의식한 ‘보여주기식 쇼’라고밖에 볼 수 없다.
중요한 숙제는 어떻게 하면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하느냐다. 중대재해법, 산업안전법 등의 과잉 처벌이 산재의 근본해법이 될 수 없듯이, 국회가 기업인을 불러다 호통치고 망신준다고 산재사고가 줄어드는 게 아니다. 하나 마나 한 질문과 답변을 할 시간에 차라리 실질적인 산재예방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낫다.
한때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OECD 최고라는 오명을 썼지만, 2000년대 이후 급격히 감소(인구 10만 명당 2000년 21.8명→2019년 6.5명)한 것은 도로망 및 자동차 성능 개선과 함께 운전자들의 법규 준수 등 안전의식이 높아진 게 주된 요인이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서도 긍극적으로 노사 모두 경각심을 갖고 안전의식을 높여 미연에 사고를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 산재 사망사고 자체도 감소 추세(2000년 1414명→지난해 882명)를 보이는 마당에 몇몇 사례를 가지고 전체를 호도해서도 곤란하다.
미국에선 기업인들이 의회 청문회에 나와 떳떳하게 주장을 펴고, 의원들도 전문적 식견으로 접근한다. 한국 국회는 언제까지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식 원님재판만 되풀이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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