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소신은 이번에도 관철되지 못했다. 올해 첫 추가경정예산안이 역대 세 번째 규모로 편성돼 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기재부는 당초 4차 재난지원금 규모로 12조원을 제시했지만 거대 여당의 힘에 눌려 20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로 정해졌다.
일각에선 홍 부총리의 소신이 여당과 청와대에서 수용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4차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당정 간 갈등이 1월 말 부각되기 시작했을 때 가장 격렬했던 대립지점은 지원금 지급 범위였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 지원을 요구한 것에 대해 홍 부총리는 소상공인 등에 한정하는 선별 지원을 고집했다.
당정 간 대립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지난달 중순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중재하며 이 같은 논쟁은 일단락됐다. 이번 4차 지원은 선별 지원을 기본으로 하고 이후에 보편 지원을 논의할 예정이다. 홍 부총리의 손이 올라간 부분이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제기한 자영업 손실보상제도 이번엔 도입되지 않았다. 홍 부총리가 군사통제구역·환경보호구역 등 다른 재산권 행사 제한 조치와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들어 정 총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기재부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원칙을 통해 지키려 했던 재정건전성 유지에는 실패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여당 정치인들이 증액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추경 규모가 당초 기재부 안 대비 8조원 가까이 늘었다. 이에 따른 적자 국채 발행 규모는 9조9000억원에 달한다. “선별 지급 등의 원칙은 추경 규모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홍 부총리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28일 추경 규모를 확정 짓기 위해 열린 당·정·청 합의 당시 분위기는 이 같은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권 관계자는 “정 총리와 이 대표가 서로를 치켜세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반면 홍 부총리는 별말 없이 먼 산만 봤다”고 전했다. 한 달 전인 지난달 2일 페이스북을 통해 홍 부총리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던 것과 대조해 무력한 모습이다.
홍 부총리가 100%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서 기재부 내에서도 걱정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전 국민 위로금’을 주자고 할 때 홍 부총리가 강하게 반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홍 부총리는 정치권과의 갈등 속에서 다음달 1일이면 경제수장으로서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재임기록(842일)을 넘어서게 된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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