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부터 두꺼운 벽틈으로 미풍이 불어오고, 메마른 땅에서는 샘물이 솟기 시작해 점차 강물로 변해갔다. 북학을 핵으로 삼은 실학이 조선 역사에 등장했다.
북학은 소외됐던 이상주의자들이 주도해 적대감을 가졌던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서 부강한 조선, 잘사는 백성을 목표로 삼자는 사회개혁의 학풍이고 사상운동이었다.
첫째, 그들이 추구한 목적과 제안한 정책은 ‘경세치용’,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단계적인 발전을 했다. 그 과정에서 인식론의 변화, 농사에서 상공업 중시 등 정책의 변동, 서학인 천주교의 수용 등을 놓고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기존 체제로부터 음양의 피해를 보았다.
조선은 두 번의 대전쟁과 패배,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한 대참사, 양반 관료들의 탐학, 성리학자들의 무능으로 붕괴하는 중이었다. 또한 신분제 일부가 무너지고, 외국과의 비자발적인 교섭, 포로들의 귀환, 통신사와 연행사들의 견문 등으로 쇄국과 성리학의 맹신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붕괴의 진행을 막아야 할 조선의 선택은 ‘체제의 강화’란 시대의 반동 또는 부분적인 양보를 통한 개선이었다. 주류들은 전자를 택해 요행을 바라며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소외된 지식인들은 보편적인 인성과 성리학의 원론에 충실하면서 사회개선의 인식과 학문을 자생적으로 만들어 갔다.
이익은 재야의 자생적인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관념성을 배격하고, 현실 개선의 방책들을 전방위로 전개한 경세치용학파이다. 뒤를 이은 홍대용은 ‘북학’을 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서양문물의 이론과 기술, 지식을 수용해 실생활에 응용하고, 도움 주는 연구를 했다. 1765년에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에 체류할 때 선교사들과 필담으로 서양사상과 천문 등 자연과학을 배우고, 선교사이며 과학자로 청나라에 영향을 미친 마테오 리치를 극찬했다. 그는 ‘의산문답’의 형식을 빌려 성리학과는 다른 천문론을 펼치면서 우주가 무한하며, 지구 중심이 아니라는 설을 주장했다( 김문용,『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
박지원은 홍대용으로부터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의 천문, 지리 등을 배우다 1780년에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때 받은 충격과 학습, 열정을 『열하일기』에서 신분제도, 수취와 조세, 농사방식과 상업 등에 대한 개선안을 표현했다. 또한 『호질전』, 『양반전』등의 패관소설 형식으로 사회비판과 개혁사상들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서얼 차별의 현실을 비판했고, 소중화 의식과 향명사대주의를 배격했으며, 농업보다도 상업과 산업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과농소초』 같은 농업 발전에 필요한 저서들을 썼지만 정책 변화를 시도할 기회가 없었다. 본인의 성격과 정조 등 기존 세력의 배척으로 50살이 돼서야 한직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임형택,『연암 박지원연구』).
북학파를 완성한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박지원의 제자였고, 명저인 『북학의』를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네 번이나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서양 사상, 기술력을 과감하게 수용해 산업을 발전시키고 상업 유통과 무역, 생활의 편리를 주장했다. 심지어는 벽돌을 생산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궁궐·도로·제방 등을 개축하고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이헌창,『박제가』).
그럼 북학파가 활동하고 실학의 토대가 완성된 18세기의 유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연행사들이 만난 러시아는 이미 아시아 국가로 변신한 후 청나라와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네르친스크 국경조약을 맺은 후 1728년에는 베링해를, 1741년에는 알래스카를 발견하는 등 동방개척을 추진 중이었다. 일본은 통신사들의 보고와 『해행문집』에 수록된 기행문에 보이듯 농법의 개량으로 생산량이 늘어났고, 어업과 상업이 발전했다. 또한 큰 건축물과 운하 도로망을 갖춘 대도시들이 번성했다. 조선술의 발달로 태평양을 넘고, 동남아시아와 청나라, 유럽과 무역을 벌이면서 문화와 기술을 수입했다. 또한 강한 자의식이 생겨나면서 고유 문화와 신도 천황을 중요시한 국학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자본주의가 시작됐으며, 정조가 등극한 1776년에는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7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괴테,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약하는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역동적인 시대였다.
만약 그들이 청나라·일본·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과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했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한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박지원·안정복·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고구려·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 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을 감았다.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문화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
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
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화 예술이 부재했다. 패관문학은 정조에 의해 금지됐고, 정선 등에 이어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풍이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청나라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빈약한 수준이었다. 또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완해주고, 우군이 될 농민과 상인들의 자각과 경제력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넷째, 남만주를 상실하고, 해양을 봉쇄한 조선의 지리적인 한계와 시대 상황 때문이다. 한반도는 쇄국정책을 취하면 입·출구가 꽉 막힌 자루 같은 형국이다. 통신사와 연행사는 국제교류와 무역을 병행한 국가정책이 아니었고, 북학파들의 차이는 사적인 견문 행위였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로 확산시킬 수 없었다. 또한 대전쟁의 후유증으로 자생적으로 경제가 회생하거나 외부 문물을 수용해서 발전시킬 토대가 마련되지 못했다.
다섯째, 기존 세력들의 강력한 방어와 저항이다. 기존 세력들은 중앙 정계뿐만 아니라 향약, 서원, 사당을 이용해 주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고 추종세력을 조직화시켜 향촌과 중앙을 연결하는 전방위 권력망을 구축했다. 또한 권력투쟁을 도덕과 인륜으로 치장해 절대성을 유지했다. 영조와 정조의 권력유지 정책도 작용했다. 특히 정조는 탕평책, 금난전권을 없애고 신해 통공발매책을 추진했으며, 서얼의 일부 기용 등 긍정적인 정책을 폈다. 하지만『열하일기』,『양반전』, 『허생전』처럼 풍자로 성리학 체제와 양반독점사회를 부정하는 패관문학 등이 유행하자 유포를 금지하는 ‘문체반정’을 시행했다. 또한 유행하는 서체가 자유로운 분위기라며 기존의 엄숙하고 강건한 서체로 돌아가자는 ‘서체반정’도 추진했다. 심지어 『주자대전집』을 기획해 주자학의 정통을 벗어나거나 양명학, 북학, 서학 등 자유로운 학문을 억제할 목적으로 주자의 저작을 수집한 후 출간하려 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쌓고 친위대를 육성하며 왕권을 강화했지만, 성리학을 보위하면서 조선을 더욱더 학문 국가, 사상 국가로 만들었다.
18세기의 조선은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논리적인 이론과 사상, 과감한 정책을 만들고, 실천했어야 했다. 하지만 북학파들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생활의 편의를 목표로 삼았다. 백성들은 그 정도의 보답을 바라고 모험을 하지는 않는 현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박지원은 허생전에 이상향을 설정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인간은 믿고 싶어하며, 현실을 변화시키려 노력한다. 때로는 대가 없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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