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매도가 장기간 계속되자 개인투자자들이 불만이 쌓이고 있다고 한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은 지난해 12월말부터 이달까지 40일 넘게 연속 순매도를 기록했다. 매도 금액만도 15조원 가량이다. 3000포인트를 넘던 코스피가 다시 2000포인트 대를 들락 거리는 요즘, 개인투자자들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한국주식투자연합회라는 개인투자자 단체가 국민연금 본사 앞에서 피케팅과 시위까지 벌였다. 대규모 연속 매도를 이어가는 "국민연금이 주가 하락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공매도를 폐지하거나 중지하자며 개인투자자들이 주장했던 말이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주범"아니었던가. 공매도 금지가 연장되자 이번에는 국민연금이 주가하락의 주범이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계속 주식을 파는 이유는 기금운영위원회가 정한 자산 배분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계획에 따르면 국내 주식 비율은 지난해 목표치가 17.3%, 올해말 목표치는 16.8%인데 지난해말 21.3%로 목표를 훨씬 웃돌아 어쩔 수 없이 주식을 계속 내다팔고 있다는 얘기다. 가격이 많이 오른 자산은 팔고 가격이 내린 자산을 사는 이른바 '리밸런싱' 일환이다. 일종의 이익실현 개념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하지만 개미들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는다. 개미들은 "내가 낸 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주가를 떨어뜨려 개인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이적 행위"라며 맹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주식 투자를 하다보면 나 말고 주식을 파는 이들은 모두가 원망스럽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호가창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뭉터기 매도 주문으로 몇개 호가가 한번에 곤두박질치며 가격이 급락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어떤 놈이" 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다 보니 공매도가 주가하락의 주범이라며 증오를 쏟아내다가 이제는 국민연금이 주가하락의 주범이라며 공격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나 말고 주식 파는 놈은 다 나쁜 놈"이라는 귀결로 이어지게 된다. 몇백만~몇천만원 주식 거래하는 개인하고 수백억~수조원을 거래하는 연기금이나 외국인을 어떻게 동일 선상에서 이야기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식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말도 하고 싶을 것이다.
맞다. 주식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돈 놓고 돈 먹는 곳에서는 언제나 돈 많은 주체가 유리하다. 개인투자자들 역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증시에 뛰어든 것 아닌가. 증시를 이끄는 것은 기관 외국인 연기금 등 이른바 '큰 손'들이다. 개미들이 증시에 들어오는 것은 이들 큰 손들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고 편승해 돈을 벌기 위한 것 아니었나.
개인들이 산 주식 가격이 올라 수익이 나는 것도 그렇게 보면 결국 큰 손들 덕분이다. 그런데 연기금이나 외국인, 기관들이 대량으로 주식을 매수해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은 괜찮고 이들이 수익을 실현하기 위해 파는 것은 안 된다고 하는 게 과연 말이 되나. 외국인이나 기관은 그렇다치고 국민연금이 수익난 주식을 팔아 이익을 실현해 기금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국민들의 노후보장에도 도움이 된다. 국민연금 조기 고갈에 대한 우려가 흘러 넘치는데 국민연금이 성공적으로 투자해 이익을 냈으면 그 이익을 실현하는 게 맞지 않나.
얼마전 국민연금이 테슬라에 투자해 대박이 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6년전 투자로 8000%대 수익률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만약 테슬라 주식에 투자한 미국의 개인투자자들이 이렇게 엄청난 수익을 올린 국민연금이 테슬라 주식을 팔면 주가가 떨어진다며 못팔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동조 시위라고 하고 싶은가.
주가가 급등하는 것은 매수자가 흘러 넘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매도를 했던 이들이 손절 매수(쇼트 커버링)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투자자들이 시장가로 손절하면 주가가 급락하듯이 공매도 했던 이들이 시장가로 환매수를 하게되면 주가는 급등한다. 매수나 매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없게 마련이다.
그런데 매수는 선(善)이고 매도는 악(惡)이라도 되는냥 몰아가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선거를 앞두고 공매도 금지 연장을 밀어붙여 결국 정부를 움직이더니 이제는 국민연금의 주식매도까지 막아버리고 싶은 듯하다.
만약 내가 투자한 주식 가격이 급등해 목표 가격대까지 왔고 이를 팔아 수익을 실현하고 싶은데 정부에서 주가가 떨어질 수 있다며 일정기간 주식을 팔지 못하게 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나.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 증시에서 내가 맘대로 내 주식도 못파냐? "고 대뜸 항의할 것이다. 그럼 남들은? 개인투자자들은 맘대로 사고 팔 수 있지만 연기금의 매도나 공매도는 제한해야 한다? 이런 내로남불이 어디 있나. 원할 때 원하는 가격에 사고 팔 수 없다면 기관이든 외국인이든 시장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IMF가 한국의 공매도 금지 연장에 우려를 표한 것도 그래서다.
"나 빼고는 다 주식 팔지말라"는 식의 주장은 억지요, 자가당착적이다. 공매도 금지가 연장된 마당에 만약 국민연금의 주식매도까지 중단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주가하락의 주범이 될까. 혹시 개미들 자신은 아닐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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