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위험, 회계에 반영하라"…기업의 ESG 책임 훨씬 커진다

입력 2021-03-11 17:32   수정 2021-03-12 01:30

앞으로 국내 상장회사들은 기후변화에 직면해 자산가치가 급격히 낮아지는 설비 등을 ‘좌초자산’으로 미리 분류해야 한다. 금융회사들은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인 기업과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최근 마련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모범규준’ 개정안에는 이처럼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 대거 포함됐다. ESG 모범규준은 상장회사들이 ESG 경영을 하려면 어떤 사항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나열한 일종의 ‘지침서’다. 금융당국은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모든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ESG 공시를 의무화할 방침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 같은 제도가 너무 빠른 속도로 도입되면 기업이 제대로 적응할 시간이 없다고 반발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후변화 위험 재무에 반영해야”
국내에서 ESG 관련 모범규준이 처음 제정된 건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거래소는 외환위기를 겪은 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마련했다. 2010년 거래소 산하 지배구조원이 환경경영과 사회책임경영 관련 모범규준을 신설했다. 2011년부터는 모범규준에 근거해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망라한 ESG 평가를 900개 넘는 상장사를 대상으로 매년 시행했다. 거래소는 이를 토대로 ‘KRX ESG 사회책임경영지수’를 산출하고 있다.

이번 모범규준 개정은 ESG 관련 최신 트렌드를 환경과 사회책임 관련 규정에 반영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2003년과 2016년 두 차례 개정됐지만 환경·사회 분야는 지난 10년간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환경 모범규준에서 가장 큰 변화는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와 관련한 위험을 자산 평가와 자금 조달, 회계 등 재무 영역에까지 반영하도록 한 점이다. 기업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직간접적인 좌초자산 위험을 미리 인지해야 한다. 과거 싼값에 전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어 각광받았던 석탄화력발전소가 대표적인 좌초자산의 예로 꼽혔다. 기후변화를 고려한 자산 재평가 작업을 통해 이런 위험자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재생에너지나 친환경 기술 개발과 관련한 자산의 가치는 높여야 한다는 게 개정안의 취지다.

자금 조달방법 역시 가능한 한 녹색채권 등 친환경 수단을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녹색채권은 발행자금이 환경 개선 목적을 위한 녹색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채권이다.

금융사들엔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인 기업이나 석탄화력처럼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하는 사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낮추도록 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내부탄소가격을 도입하는 등 환경회계 원칙도 명시했다. 내부탄소가격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을 내재화하기 위해 탄소 배출에 가격을 매기는 것을 뜻한다.
생활임금·집중투표제 도입도 포함
사회 분야에서는 기업 활동의 모든 과정에서 인권 이슈가 고려될 수 있도록 인권정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임직원은 물론 협력사, 고객, 지역사회 거주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포함된다. 인권 관련 이슈를 식별하고 인권 위험을 완화하는 인권영향평가 역시 모든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도록 했다.

노동 관행도 바꾸도록 했다. 근로자들에겐 최저임금을 넘어 임금근로자 평균 임금과 생활비, 사회보장 이전소득 등을 반영한 적정 생활임금을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제도는 기간제와 사내 하도급 근로자 등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지배구조에서는 대주주에 대한 소수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 모범규준은 이사 선임 시 집중투표제를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집중투표제는 기업이 2인 이상 이사를 선출할 때 의결권을 ‘주당 1표’가 아니라 선출하는 이사 수만큼 줘 소수 주주가 특정 후보에게 의결권을 몰아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 좌초자산

기후변화 등 환경의 변화로 자산가치가 떨어져 상각되거나 부채로 전환되는 자산을 의미한다. 석탄화력발전소가 대표적이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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