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미나리'와 병아리 감별사

입력 2021-03-11 17:58   수정 2021-03-12 00:17

아빠를 따라 병아리 감별장에 간 아들이 왜 어린 수컷을 폐기하는지 물었다. 아빠는 아들에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맛이 없거든. 알도 낳지 않고….” 그런 다음 한마디 더 붙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 돼야 해.”

영화 ‘미나리’에서 아빠는 ‘쓸모 있는’ 병아리를 선별하는 사람이다. 같은 사료를 먹여도 암컷만큼 살이 잘 붙지 않고 달걀을 낳지도 못하는 수컷을 골라내는 게 일이다. 부화된 지 30시간 안에 암수를 구별해야 하니 시력이 좋고 손놀림이 섬세해야 한다.

병아리 감별사는 손재주 좋은 한국인에게 잘 맞는 직업이다. 196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이었고, 해외 이민자들에게는 낯선 땅에 정착할 출발점이 됐다. 페루로 간 첫 한인들 또한 10여 명의 병아리 감별사였다. 지금도 세계 병아리 감별사의 60%를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병아리 감별사만큼 한국인의 애환이 서린 이민자 직업은 세탁업이다. 1976년 미국으로 간 재미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에 나오는 아버지도 세탁소 주인이다. 세탁소는 짧은 영어와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 손님이 세탁물을 가져와 맡기고 때 되면 찾아간다. 세탁비는 한국보다 2~3배 높다.

한때는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주요 도시의 한인 절반이 세탁과 봉제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곳곳에 중식당을 차리는 중국인, 값싼 모텔을 운영하는 인도인과 함께 ‘아메리칸 드림’의 주역이 됐다. 베트남인은 손톱미용, 캄보디아인은 도넛가게로 생활기반을 다졌다.

캐나다로 간 한인은 낚시용 지렁이잡이와 샌드위치 가게를 주로 했다. 쿠바와 멕시코에서는 사탕수수밭 노동,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선 의류판매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호주 한인들은 청소부와 페인트공, 용접공으로 돈을 벌어 자식 공부를 시켰다. 이후 배관공과 에어컨 수리공이 많아졌고 요즘은 전기·전자, 의료 영역의 전문직이 늘었다.

영화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도 병아리 감별사의 아들이다. 예일대 생물학과 졸업 후 의사가 되려던 그는 메스 대신 카메라를 잡았고, 골든글로브상까지 받았다. 이들 모두 이역만리 타국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꿈을 꽃피운 주인공이다. 아무 데나 뿌리를 잘 내리고 병충해에도 강한 미나리와 닮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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