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이야기] 디지털 시대, 넘치는 정보에도 신뢰가 어려운 이유

입력 2021-03-15 09:00   수정 2021-03-28 15:15


신뢰가 클수록 좋을까. 영국 상원의원이면서 철학자이자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오노라 오닐이 TED 강연 ‘신뢰에 대한 오해들’에서 제기한 의문이다. 그는 사회 전체가 신뢰를 잃었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단순화된 믿음에 이의를 제기했다.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목표이며, 그보다 신뢰성 있는 대상을 더 많이 신뢰하고, 신뢰성 없는 대상을 신뢰하지 않는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뢰와 신뢰성
분명 신뢰와 신뢰성은 다르다. 단순히 ‘믿음이 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편적인 신뢰를 부추기는 방법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사람들은 탐욕에 사로잡히면 무턱대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로 유명한 버니 메이도프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다단계 금융사기인 ‘폰지 사기’로 수십 년에 걸쳐 650억달러(약 66조원)의 돈을 횡령했다. 메이도프에게 돈을 맡긴 사람은 수많은 유명인사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뉴욕메츠 구단주인 프레드 윌폰, 제너럴모터스(GM)의 금융 자회사인 GMAC의 에즈라 머킨 회장 등이다. 메이도프는 장기간에 걸쳐 차근차근 명성을 쌓았다. 너그럽고 자선활동을 많이 하고, 유명인들처럼 롱아일랜드와 팜비치의 컨트리클럽과 유대인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누구보다 믿을 만해 보이지만, 신뢰의 피해는 매우 컸다. 신뢰가 아닌 신뢰성이 중요한 이유다.
신뢰성의 근거
많은 신규 투자자는 메이도프의 고객 명단에 부자와 유명인 그리고 그의 친구와 가족 명단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신뢰했다. 이는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강력한 신호로 작용했다. 관계의 단서가 자동으로 신뢰를 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지만, 온라인을 통한 사회적 연결이 활발한 오늘날 관계의 단서가 신뢰에 주는 힘은 보다 커지고 있다. SNS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한 집단에서 쌓인 신뢰는 다른 사람에게 이동하고 확산될 수 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지원자의 SNS 인맥을 살펴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친구로 등록된 수가 다섯 명 미만이면 사기 계정일 수 있다는 위험신호로 간주하기도 한다.

신뢰성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오는가에 관해 옥스퍼드 경영대학원의 레이처 보스먼은 《신뢰 이동》을 통해 능력과 신뢰도, 정직이라는 요소를 꼽는다. ‘능력 있는 사람인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정직한 사람인가’가 기준이라는 것이다. ‘능력’은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요리사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 파일럿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에 맞는 기술과 지식, 경험을 갖추었는지 여부에서 신뢰성이 나온다. ‘신뢰도’는 상대가 약속한 일을 일관되게 해줄 것임을 의미한다. 이 사람을 의지해도 될지 혹은 끝까지 일을 마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정직’은 진실성과 의도에서 나온다. 상대가 나에게 보이는 관심과 동기는 무엇인지, 상대와 나의 목적이 일치하는지, 상대가 거짓 혹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신뢰성이 형성된다.
변함없는 신뢰 시스템
디지털 전환을 통해 신뢰의 틈새는 많이 메워졌다. 신뢰성을 측정하기 위한 정보가 정확하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1993년 피터 슈타이너의 만화 ‘개’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개는 컴퓨터에 앉아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네가 개인지 몰라”라고 이야기하지만, 20년 뒤 패러디 만화 《과학기술의 즐거움》에서는 선글라스를 쓴 요원이 등장해 “메타데이터 분석 결과 놈은 갈색 래브라도가 틀림없고, 흰색과 검은색 얼룩이 있는 비글 잡종견과 사귀는 사이로 의심됩니다”라고 두 마리 개에 대해 설명한다. 디지털화된 오늘날 현실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신뢰 역시 이전에 몰랐던 많은 정보를 통해 형성된다. 객관화와 수량화를 통해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전체 신뢰 과정의 아주 일부일 뿐이다. 디지털화로 다양한 정보 수집이 가능하지만, 베이비시터를 만났을 때 느낌이 좋지 않으면 수집된 정보와 무관하게 돌려보낼 것이다. 복잡한 문제다. 분명 온라인을 통한 신뢰 과정은 보다 스마트해지고 더욱 넓게 확산될 것이다. 많은 정보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 채 낯선 사람을 신뢰하는 일이 여전히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다. 수집된 정보의 질과 양이 달라졌지만, 해석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대면거래가 일반화되어 신뢰가 보다 중요해지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 기술과 인간의 시너지를 통한 해결이 기대되는 이유다.
☞ 포인트
단편적인 정보의 홍수로
객관화·수량화 쉬워졌지만
사람의 판단은 여전히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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