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우후죽순 쏟아지는 '官製' 벤처펀드

입력 2021-03-14 18:34   수정 2021-03-15 00:12

“이렇게 잔뜩 만들어놨다가 나중에 제대로 관리가 될지 걱정입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벤처펀드를 결성하겠다고 나서자 투자업계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금융을 통해 대규모 자금이 벤처업계로 밀려드는 마당에 기초자치단체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는 최근 1호 벤처창업펀드인 ‘강남창업펀드’(가칭)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강남구와 민간 운용사가 자금을 매칭해 총 200억원 규모로 펀드를 키울 계획이다. 강남구에 있는 중소·벤처기업에 자금을 지원해 지속성장을 이끌고 선순환 벤처투자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취지다. 지자체의 벤처펀드 조성 움직임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기 부천과 고양, 강원 춘천, 전북 군산 등 시 단위 지자체뿐 아니라 서울 관악구와 구로구 등 구 단위 지자체까지 벤처펀드를 우후죽순 결성하고 나섰다. 과거엔 주로 서울시와 인천시, 경기도 등 ‘큰손’ 지자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역에 기초자치단체도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펀딩에 어려움을 겪는 신생·중소형 벤처캐피털(VC)에는 희소식이다. 지난해 VC들이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민간 출자자(LP) 자금 매칭에 어려움을 겪다가 펀드 미결성 위기에 내몰렸던 점을 고려하면 지자체 예산은 ‘가뭄 속 단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모태펀드, 성장금융 등의 공적 자금으로 채워져 있는 벤처펀드에 지자체 돈까지 들어가면 운용은 더욱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자체들은 자체 출자액의 2~4배를 관내에 투자할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기존 투자자로서는 지자체가 LP 자격으로 끼어들면 주목적 투자 분야 외에 지역 한정 조건까지 따라붙으니 불만일 수밖에 없다.

지자체가 선순환 투자구조를 형성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대도시가 조성해놓은 ‘관급’ 벤처펀드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구 단위까지 또 다른 펀드를 조성하는 게 필요한지 의문이라는 비판도 만만찮다. 또 지자체의 펀드 경쟁은 “다른 구에 갈 돈을 우리 구에 유치하자”는 식의 지역 우선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연구실 창업기업들이 있는 관악구, 스타트업이 많은 강남구는 벤처 환경이 비옥해 투자금이 쏠리는 곳이다. 운용사들도 펀드의 전체 수익률을 떨어뜨릴 수 있는 척박한 지자체의 출자 소식은 철저히 외면한다. 실제 지방의 한 지자체가 낸 펀드 출자 공고엔 지원 운용사가 전무했다. 무분별한 지자체 펀드 경쟁이 추가 창업을 유발하기보다 벤처 시장의 한정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을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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