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털처럼 보드라운 봄이 왔습니다. 가끔 바람이 심술을 부리기는 하지만 햇살은 푸근하고 하늘도 깊어졌습니다. 멀리 떠나는 여행도 의미있지만 때로는 가볍게 떠나 예술의 향취를 느끼고 돌아오는 소풍 같은 여행도 매력적이겠죠. 강원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이 그런 곳입니다. 안도 다다오, 백남준, 제임스 터렐 등 거장의 예술품을 보며 한나절 즐겁게 몰입하거나 테라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봄의 기운을 듬뿍 받아 오는 것은 어떨까요?
국내에도 2008년 완공된 제주 휘닉스아일랜드의 글라스하우스와 유민미술관을 비롯해 본태박물관 등 그의 작품이 적지 않다. 뮤지엄 산은 그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8년에 걸쳐 지어진 뮤지엄 산은 노출 콘크리트, 높은 천장과 자연채광 등 안도 다다오의 특징(signature)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뮤지엄 산에는 모두 네 개의 정원이 있다. 박물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정원이 플라워가든이다. 이름 그대로 80만 포기의 붉은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패랭이꽃밭 위에는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가 1995년에 제작한 작품이 세워져 있다. 붉은색의 역동적인 조각상은 풍향계처럼 바람이 불면 윗부분이 움직인다.
플라워가든과 워터가든 사이를 잇는 것은 자작나무 숲이다. 360여 그루의 자작나무가 도열하듯 서서 관람객을 맞는다. 자작나무 숲 너머로 앤서니 카로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정원이 보인다. 워터가든은 안도 다다오 건축의 특징인 물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연못 가운데 난 길 위로 마치 박물관의 정문 같은 거대한 붉은 조각품이 보인다. 알렉산더 리버만의 1998년 작품 아치웨이(Archway)다. 비스듬히 절단한 붉은 원기둥이 연못에서 얼기설기 솟아나 아치를 이룬다.
본관은 네 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청조갤러리와 페이퍼갤러리로 나뉜다. 청조갤러리는 2019년 작고한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이 평생 모은 컬렉션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비디오 아트의 세계적 거장 백남준의 작품 10여 점을 주기적으로 교체 전시하는 백남준 홀을 비롯해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김창열 등 거장들의 작품이 1년여 주기로 번갈아 전시된다. 페이퍼갤러리는 한솔그룹의 한솔종이박물관을 확장한 개념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이동 통로에서 빛을 발한다. 밖에선 보이지 않던 노출 콘크리트가 등장하며 복도의 한쪽 벽면을 이룬다. 그 맞은편 벽 건물 외관은 붉은 빛깔의 파주석이다. 통로의 폭은 좁지만 높은 천장이 특징이다. 천장과 지붕 사이로 자연광이 스민다. 빛은 틈새로 들어와 조명과 장식의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또 아래쪽 유리벽이 갑갑함을 없애고, 벽에 산란하는 빛은 율동감을 더한다. 야외 테라스의 계단식 물정원도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배우 공유가 커피 광고를 찍었던 장소로, 다랑이논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했다고 한다.
돌을 테마로 한 스톤가든도 여러모로 독특하다. 정원 곳곳에는 마치 돌무덤처럼 생긴 아홉 개의 돌 구조물(스톤마운드)이 놓여 있는데 안도 다다오가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마술 같은 공간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지각하는 것이 진짜일까. 혹은 미망과 허상 속에서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봄날 빛과 어둠 속에서 우문(愚問)을 거듭하고 있는 나는 실재(實在)하는 것일까.
원주=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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