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들과 만날 때도 테이블 회의보다 함께 걷는 ‘산책회의(walking meetings)’를 택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혁신 제품들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그 길은 애플 신화의 상징인 ‘인문과 기술의 교차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의 회의 방식은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잡스가 협상 상대와 의견을 조율하는 방법도 이른바 ‘산책 교감’이었다. 그 덕분에 한때 애플에서 쫓겨나 새로 만든 회사 넥스트를 애플에 팔고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넥스트 매각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길 아멜리오 당시 애플 최고경영자(CEO)를 초대해 집 근처를 함께 걸었다. 그렇게 두세 바퀴 정도 도는 동안 아멜리오는 잡스의 비전과 열정에 완전히 매료됐다.
산책은 창의성을 빛나게 하는 부싯돌과도 같다. 스탠퍼드대 연구팀에 따르면 걷기가 창조적 사고력을 60% 이상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천히 걷는 동안 우리 뇌에는 학습과 기억을 다루는 부분의 혈류가 늘어난다. 12분간의 산책만으로 주의력이 높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미국심리학회 연구 결과도 있다.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또한 잡스에게 영감받아 걷기를 즐긴다. 직원 채용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후보자와 숲길을 걸으며 ‘산책 면접’을 본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인성과 장단점을 발견하고 즉석에서 채용을 결정하기도 한다.
‘괴짜 경영자’로 유명한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 산책”이라고 말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도 “무언가 생각하려면 걷기 시작한다”고 했다.
산책은 창의력과 집중력만이 아니라 생각의 폭까지 넓혀준다. 한자로 산(散)은 ‘흩다’ ‘한가롭다’와 함께 ‘나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책(策)은 ‘꾀’ ‘서적’ 외에 ‘헤아리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처럼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헤아리고 이를 누군가와 나누는 게 산책이다.
산책의 또 다른 이름은 성찰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어 다니면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나무 사이를 소요(逍遙·자유롭게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하며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서 소요학파라는 이름도 나왔다.
산책에는 앞뒤 경계가 따로 없다. 문장으로 치면 자유로운 산문(散文)과 같다. 형식의 제약이 없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걸음걸이도 제 마음대로다. 혼자 길을 나서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이럴 때 산책은 시간의 틈새를 걷는 일이다.
여유롭게 걷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들리지 않던 소리도 들린다. 영국 시인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의 시 ‘가던 길 멈춰 서서’처럼 ‘다람쥐가 풀숲에/개암 감추는 것’도 볼 수 있다. 시간이 없다고들 하지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만 있어도 충분하다. ‘밤하늘처럼/별들 반짝이는 강물’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 여유가 아름다운 여인의 눈과 발, 춤추는 맵시,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게 해 준다. 뾰족한 직선의 세상을 둥글게 보듬는 곡선의 의미 또한 이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잡스도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으며 곡선의 사고에 눈을 떴다고 한다.
어느 날 우리도 한적한 공원을 걷다가 잡스와 저커버그처럼 반짝이는 영감을 만날지 모른다. 벌써 길섶에 연두색 풀잎이 돋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싹트기 시작한다. 곧 청보리 사이를 거니는 답청(踏靑)의 계절이다.
산책은 심신 건강의 '묘약'
산책을 즐기면 뇌의 혈류량이 늘어나 치매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 매일 20~30분씩 햇볕을 쬐면 하루 필요량의 비타민D가 생성된다. 뇌 속에서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도 많이 나온다. 세로토닌은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과 결합해 숙면을 돕는다.
식사 후의 산책은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포도당이 지방으로 저장되는 양을 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만인 경우엔 포도당이 지방으로 변환되는 속도가 더 빠르므로 식사 후 꼭 걷는 게 좋다. 자세는 ‘뒷짐 걷기’가 유리하다. 가슴을 넓게 펴고 목과 허리를 곧게 하면 인체의 중심인 등뼈에서 오는 갖가지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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