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은 롯데그룹의 본산(本山)이다. ‘88올림픽’이 열린 해에 2호 백화점을 잠실 허허벌판에 개점한 신격호 롯데 창업자의 혜안은 탁월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신묘한 택지(擇地) 능력과 함께 롯데는 요즘 말로 쇼핑 플랫폼을 만들었던 셈이다. 사람과 물자를 모이게 만드는 곳을 플랫폼이라고 규정한다면, 온라인 개념이 없던 당시에 잠실 롯데 타운은 ‘오늘의 쿠팡’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롯데월드타워는 롯데타운 내에서도 핵심 중의 핵심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집무실을 비롯해 롯데지주 등 롯데의 ‘브레인’과 핵심 계열사들이 이 곳에 입주해 있다. 휘황찬란한 외관과 함께 롯데월드타워는 복잡한 내부 구조로도 유명(?)하다. 위로, 옆으로 모두 규모가 방대해 문과 문을 잇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해도 셈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 건물에 오랫동안 근무한 롯데 직원들조차 다른 계열사를 찾아가려면 몇 번쯤 헤매기 일쑤다.
미로와 같은 롯데월드타워의 건물 구조는 요즘의 롯데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매출 90조원에 육박하는 재계 5위의 롯데는 지난 몇 년 간 세상을 놀라게 할 상상력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지주가 뭔가 하겠죠”(계열사 임직원들), “각 계열사별로 독립성을 갖고 있으니 이제 알아서 해야죠”(지주 임직원) 같은 ‘핑퐁’ 현상이 종종 목격될 정도다. 임원과 직원들 간의 괴리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롯데쇼핑만 해도 평직원들 사이에선 “과거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임원들의 용퇴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롯데쇼핑은 2017년부터 작년까지 내리 4연속 당기순적자를 냈다. 1조9730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이 돈이면 금융권 대출을 끼고 4조~5조원 규모의 대형 M&A(인수·합병)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베이코리아를 인수할 수 있는 금액이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처음으로 글로벌 컨설팅사를 고용해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조직 진단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차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미래형 배터리, ‘펜데믹’을 극복할 차세대 바이오 산업, 쿠팡을 능가할 e커머스(전자상거래) 모델 등 롯데그룹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투자 여부를 저울질 중인 목록은 여러가지다.
롯데의 반전이 성공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상상력’이다. 유통 산업에 국한한다면, 신세계가 네이버와 손잡으며 ‘적과의 동침’을 택한 것처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롯데그룹 내부에서도 흥미로운 담론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만 하겠다. ‘롯데라는 브랜드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다. 신 회장이 롯데의 총력을 기울여 만들라고 지시했던 통합 온라인 쇼핑몰인 롯데온만 해도 계열사 일각에선 굳이 ‘롯데’를 넣었어야 했냐는 비판이 일었다.
신세계가 네이버와 손잡았으니, 롯데는 카카오와 제휴해야한다는 의견도 솔솔 나오고 있다. 잠실롯데월드를 카카오의 캐릭터로 도배한 ‘카카오 월드’로 만들자는 제안이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네이버와 달리 카카오는 제휴를 통해 서로 시너지를 낼 만한 영역이 많다는 점에서도 꽤나 현실성이 높은 ‘상상’이다.
신동빈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연합이라는 엉뚱한 시나리오가 실제 현실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손정의 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소프트뱅크비전펀드를 통해 쿠팡을 미 뉴욕증권거래소에 화려하게 상장시켰다. 다른 쿠팡의 투자자들과 달리 장기 투자를 약속한 손정의 회장은 아시아를 기반으로 글로벌로 뻗어나가려는 야심가다. 제프 베이조스의 대항마는 김범석 쿠팡 창업자가 아니라 손정의 회장이다. e커머스, 모빌리티, IT 플랫폼을 결합한 그만의 제국을 만들려는 손 회장에게 ‘글로벌 롯데’는 또 하나의 강력한 연합 세력일 수도 있다.
뽕밭이던 잠실(蠶室) 위에 재계 5위의 거대 기업을 만든 롯데의 경험과 저력은 쿠팡과 같은 ‘유니콘’들이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자산이다. 롯데의 길고 긴 침묵은 다시 한번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려는 신동빈 회장의 ‘일보후퇴’일 수 있다. ‘현금 부자’ 롯데가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껏 펼쳐, 세상을 놀라게 할 반전 드라마를 쓸 날을 고대해본다. 어쩌면, 신동빈 회장은 지금 이 순간 글로벌 전기차 시장과 글로벌 바이오 산업과 글로벌 e커머스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투자를 준비 중일 지도 모른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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