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에 맡겨둔 봄을
아래층에 맡겨둔 약속을
아래층에 맡겨둔 질문을
아래층에 맡겨둔 당신을
아래층이 모두 가지세요
그 상자를 나는 열지 않아요
먼저 온 꽃의 슬픔과 허기를 재울 때
고요히 찬 인연이 저물 때
생각해 보면 가능이란 먼 것만은 아니었어요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문학동네) 中
살아온 날들의 과거를 상자에 담아두고 떠난 사람들. 어떤 상자들은 비밀스러워요. 내게도 그런 상자 하나가 있고, 우리는 각자 내 것으로 가졌던 내용물들을 간직하고 살아왔겠지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은 상자를 닫아 두기로 합니다. 머물기만 한다면,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은 없겠지요. 어떤 가능한 미래를 향해 떠날 때 우리는 새로운 자기 앞의 생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김민율 시인(2015 한경신춘문예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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